가을이 익어간다

자전거 탄 풍경

by 밝은 숲


여름 들판 풍경

부엌 창문을 통해 보이는 가을 들녘은 풍요롭다. 아침을 준비하고 점심을 만들고 저녁밥을 지으면서 나는 무심히 창밖을 내다본다. 15층 아파트 부엌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익숙하다. 매일 보아 익숙한 풍경이지만 시간의 흐름이 담겨있어 매번 새로워지고 계절의 흐름이 느껴져 감정은 다채로워진다.


여름 들녘의 초록빛을 지나 가을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가을을 가까이 느끼고 싶어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온다.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감나무에 주홍빛 감이 선명하고 풍성하다. 어느 집 마당에서는 무화과가 익어가고 다른 집 마당에서는 대추가 익어간다.


마을을 지나 자전거 도로가 있는 논길로 접어든다. 도로 우편에는 논이 펼쳐져 있는데 처음 마주한 논은 빈 들이다. 어느새 수확을 했는지 텅 비었다.

수확이 끝난 논에 백로 몇 마리가 먹이를 찾아 날아들었다. 빈 들에 하얀 백로를 눈에 담은 나는 사진으로 백로를 남기고 싶어 자전거를 세웠다.


자전거를 세우는 순간, 찰깍거리는 소리와 내 모습에 놀란 백로 두 마리가 하얀 날개를 활짝 펴 먼 들로 날아간다.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백로의 몸짓은 우아하다.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빈 들에서 그들은 먹이를 찾아 긴 목을 추켜세운 채 긴 다리로 걷고 있다. 그들의 뱃속 사정과 상관없이 빈 들에서 백로는 우아하다.

수확이 끝난 한 마지기의 논을 지나 자전거 바퀴를 굴려간다. 페달을 밟으며 나아가는 내 눈앞에는 노랗게 익어가는 논들이 펼쳐져 있다. 사각형으로 구획 정리된 논은 여물어가는 벼들로 가득하다.


자전거 바퀴를 멈추고 논 가까이로 걸어간다. 멀리서 본 논은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되는데 가까이서 본 벼들은 하나의 개체로 보인다.


봄에 심었을 작은 모가 연둣빛에서 초록빛으로 바뀌며 봄이 지나갔다. 한때의 가뭄과 무더위를 겪으며 모는 조금씩 천천히 여름을 견뎠을 것이다. 몇 번의 태풍으로 벼는 쓰러졌다 일어섰다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낮의 가을 햇볕과 시원한 저녁의 가을바람 사이에서 벼는 여물어가고 있다.


누구 논인지도 모르는 널따란 논에 가까이 다가가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벼이삭들을 바라본다. 초록빛깔 볏잎들은 할 일을 다 마쳐 노랗게 퇴색되어 가는 중이고 한 알 한 알 영글어가는 벼 이삭들은 많이 영글수록 고개를 숙이고 있다.


벼 포기마다 매달려있는 벼 이삭들은 기특하고 예뻐 보인다. 세월이 가져다주는 온갖 풍파를 겪어내고 어떤 성취를 이룬 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직하게 살아오고 성실하게 견디어낸 시간들에 대한 결과물로 벼 이삭들이 자라는 시간이다.


벼 이삭들은 조만간 수확이 되어 쌀이 되고 밥이 될 것이다. 그 밥으로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을 거고 또 밥을 먹기 위해 우리는 벼들이 자라는 것처럼 정직하고 성실하게 밥벌이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는 인생이 쌀이 되기 위한 벼에게는 일 년으로 응축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을 바라보는 나는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하지만 그 풍요로움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시간 속에 담겨있는 인내나 농부가 들여야 할 품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이 주는 수확의 기쁨은 값지고 소중하다. 벼가 익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마음은 풍성해진다.


숨막힐 정도로 뛰어버린 장바구니 물가 걱정과 초미세먼지가 나쁨인 오늘의 대기질에 대한 근심과 예전같지 않은 기후 변화에 대한 위기감은 잠시 내려 놓고 오늘은 가을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열어놓는다.


산에서는 밤이 익어가고 마을에서는 감과 대추가 익어가고 들판에서는 벼가 여물어가고 있는 때다. 여물어지고 풍성해지는 들녘에서 나는 자전거 바퀴를 굴려 앞으로 나아간다.


노란 들판에서 소리없이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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