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수청산-대복이 이야기

이문구 <관촌수필> (문학과 지성사)

by 밝은 숲

이문구 선생의 <관촌수필> 네 번째 이야기 '녹수청산'은 1973년 문예지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된 소설이다. '녹수청산'은 소설 속 화자가 일곱 살부터 아홉 살 무렵까지 함께 놀았던 대복이에 관한 이야기다.


일곱 살배기 화자보다 여남은 살은 더 먹었지만 층하가 있던 시절 양반 가문의 어린 화자에게 대복이는 듬직하고 든든한 친구였다. 집 안에서 옹점이가 그랬듯이 집 밖에서는 대복이가 보호자 역할을 해준 셈이다. 그래서 화자의 기억 속에서 대복이는 철 모르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대복이네 집은 서너 칸짜리 초옥으로 뒷간은 지붕도 없이 거적때기로 앞만 가려졌고 가져갈 게 없는 살림살이는 썰렁하고 심란스럽다. 하지만 어린 화자에게 대복이네 집은 마음대로 놀 수 있는 놀이터였다. 넓은 집이지만 어른과 손님들로 항상 붐볐던 자신의 집에서 어린 화자가 마음 놓고 놀 공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대복이 아버지 조중찌는 비부살이를 하던 사람으로 술고래, 투전꾼으로 살다가 대복이를 얻고는 사람 구실을 하게 된 인물이다. 대복이 엄마는 수다스럽고 간살스러운데다 손버릇이 나쁘다. 하늘과 땅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살이로 대복이 엄마는 화자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끼니를 챙겼고 대복이 아버지는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며 연명했다.


대복이는 씨름판이 벌어지면 씨름 선수로 나가 돼지 새끼를 타 올 만큼 기운이 세고 키도 큰 장정이다. 어린 화자는 멜빵 달린 반바지에 생모시 반소매를 걸치고 졸래졸래 대복이를 따라다니며 여름에는 갯벌에서 조개와 게를 잡거나 낚시를 하고 겨울에는 산에서 꿩과 토끼를 잡고 대복이가 새총으로 잡은 참새를 구워 먹으며 함께 놀았다.


시절이 바뀌어 대천해수욕장에 미군 부대가 생기면서 읍내에 미군들이 바글거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수확한 농수산물을 시장으로 가져가 미군 물건과 물물교환으로 바꾸어 맛보고 사용해 보면서 서양 문물에 젖어들었다.


대복이는 미군들 구두닦이를 하러 해수욕장에 다녔는데 그러던 어느 날, 제복 입은 순사가 대복이를 앞세우고 대복이네 집으로 들어왔다. 미군 물건을 훔친 대복이를 미성년자라 정상 참작하여 보호자에게 데려온 것이었다.


대복이는 그렇게 도둑질을 배워 마을에서는 닭이 없어지고 콩자루와 참기름병이 없어졌다. 대복이의 도둑질은 마을을 벗어나 주변 지역으로 영역을 넓혔는데 곧잘 들켜 연행되기 일쑤고 우범자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미성년자인 데다가 죄질이 무겁지 않아 따귀 몇 대 맞고 풀려 나오곤 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대복이는 소를 훔쳐 팔아먹고 공주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6.25 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은 내려오면서 모든 형무소의 문을 열었고 그로 인해 대복이도 풀려나게 되었다. 인민군 덕분에 풀려 난 대복이는 무법 시대를 이용해 빨간 완장을 차고 자신의 전과를 미장하며 바삐 돌아다녔다.


그런 대복이가 다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참봉집 손녀딸로 사범학교 재학 중 인공 치하에서 아이들에게 북한 노래를 가르치던 순심이를 건드리려다 강간 미수로 잡혀 들어간 거였다.


1950년 가을이 되어 세상이 다시 한번 뒤집어지면서 인민군이 물러나고 국군이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하게 되면서 복역하던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 덕택에 다시 풀려 난 대복이는 앙심을 품고 빨갱이 집안은 씨를 말려버릴 것처럼 떠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순심이가 사라졌다. 어쩐 일인지 대복이는 그 집 머슴으로 들어갔다. 인공 치하에서 순심이의 부역으로 모든 걸 압수당해 시래기 한 줄 남아 있지 않은 참봉집에 대복이가 머슴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어쩐지 미심쩍은 일이어서 관촌 마을에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전쟁 중에도 학교는 문을 열었고 화자는 책걸상 없는 맨바닥에 앉아 책 한 권을 두서넛이 함께 보며 학교엘 다녔다. 전쟁 통에 학교는 공부만 가르친 게 아니라 입영 장정들을 전송하는데 학생들을 동원했다. 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때라 영장이 나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서 가족들은 기차역까지 따라 나와 화물 열차에 실려가는 장정들의 마지막을 전송했다. 출정하는 날 읍내는 장병 가족들의 통곡소리와 울음소리에 초상집이 되었고 학생들은 만세를 외치고 군가를 불렀다.


다음 해 봄이 되자 대복이에게도 징집영장이 나왔다. 대복이가 출정하기 전 날, 화자의 어머니는 대복이를 불러 저녁을 대접했고 대복이는 꼭 살아오리라 다짐하면서 떠났다. 대복이가 떠나자 사라졌던 순심이가 갑자기 나타나 경찰에 연행되었다.


행방이 묘연했던 순심이는 자기 집 골방 구들장을 들어내고 파내 굴을 만들어 두더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날이 너무 추울 땐 굴에서 나와 구들에 몸을 지졌는데 그러던 중 대복이가 들이닥친 거였다. 대복이는 순심이를 해코지할 셈으로 들어왔지만 그녀를 보호해 주기로 마음을 바꾸어 먹고 머슴살이를 자청했던 것이다.


대복이가 징집 열차를 타러 떠나자 순심이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사람을 보려고 변소에 숨었다. 대복이가 안 보일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며 변소에 숨어있던 순심이는 갑자기 구토를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온 구토는 한참 동안 가라앉지 않았고 누군가 그런 순심이를 발견하고 신고해 연행된 것이었다.


대복이는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떠나고 순심이는 임신한 몸으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대복이는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살아서 관촌마을에 돌아와 순심이가 자신의 아이를 밴 몸으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이 녹아있는 <관촌수필> 중 네 번째 이야기 ‘녹수청산’을 읽으며 나는 대복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역사의 고단함 속에서 스러져 간 수많은 대복이들을 떠올린다. 어떤 대복이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을 테고 어떤 대복이들은 살아 돌아왔을 것이다.


살아남은 대복이들이 살아낸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무자비함을 견뎌야 하는 시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시대였기에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하고 북받치는 감정들이 교차한다.


작가에게 대복이가 어린 시절 추억 속의 그리움이라면 나에게 대복이는 겉으로는 센 척 하지만 속은 여리고 정이 깊은 사람, 마음 깊은 곳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깃들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대복이가 살아남았기를, 살아서 순심이와 아이를 만났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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