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핵심은 뭐다? 팀플레이 명 '따로 또 같이'

by 홍고롱



5월, 같이 외국 가자던 그녀를 두고 나는 혼자 떠났다.

약 2주간의 여행.

그녀는 꼼짝없이 집사 대타가 되어 우리 집을 지켰다.


돌아오니, 내가 미워서 이야기하기 싫대.

그래놓고 하루도 안 돼서 이랬고 저랬고,

미주알고주알 쏟아내며

목욕탕 한 번 다녀오니 관계 원상복구 완료.


집안 곳곳엔 그녀의 손길이 묻어 있었다.

꽃집 아가씨던 그녀.

꽃다발 포장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천장에 매달려 있던 걸 멋지게 다시 재구성해 놓았네.


혼자 방콕 가는 게 미안해서 사놓았던 카네이션이

고양이들 때문에 목이 한 차례 꺾였다가 다시 피었다고,

그걸 보며, 자기가 다시 살아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나,

그녀는 혼잣말처럼 웃었다.


아직은 '배려'가 어색한 우리 공주님은
방콕 후유증으로 10일 가까이 입원한 딸을 위해
또다시 딸의 집을 지켰다.


엄마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3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난 엄마는,

외할아버지를 빼닮아 유달리 예뻤고,

막내딸답게, 부엌살림은 배우지 않은 채

예술계를 종횡무진하며 멋진 처녀 시절을 보냈다.


그 후 14년을 아빠 선거 뒷바라지에 온 힘을 쏟던 그녀는,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갈피를 못 잡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몰랐던 것 같다.

("왜 아무도 가만히 있는 나한테 길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하고 억울해하지만,
사실 가만히 있지도 않았다.

아빠의 마지막을 알리고 싶다며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고,
장기 프로를 따고,
노래로 온라인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하나씩 개척해 갔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여자다.)


그리고 그녀는 답을 내렸다.

이젠 '나'를 위해 살겠다고.

(지금껏 재혼 얘기만 나와도 단호하게 선을 긋는 이유도,

'나'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과,

10억 가진 아저씨가 나를 놓고 오라고 하는 걸 보며,

다음 남자는 없다고 못 박았다.)


우리 집은 항상 어려웠던 것 같은데

나는 그리 어렵게 살진 않았다.

엄마의 유일한 공주였던 나는,

하고 싶은 걸 웬만하면 다 하며 살았다.


선생님들에게 돈으로 찔러주기는 죽어도 못 할지언정,

반에 월남쌈이며, 잡채며, 엄마표 간식 공세들이 이어졌다.


지금도 친구들은 "어머님 잘 계시냐"고 묻는다.

나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엄마가 생각난다고.


그런 엄마가 난 못마땅했다.
퍼주는 엄마 말고, 나한테만 퍼주는 엄마가 좋았다.
외동딸답게, 욕심도 컸다.


대학에 갈 무렵, 엄마 가슴에 대못 하나 박았다.

"엄마 제발, 대학교에서만큼은 음식 가져오고 하지 마."


엄마는 그날,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대학에 들어가자,

이젠 대학생활은 니 몫이라며 딱 잘라 말하더니,

"대신 외국 가고 싶으면 전액 지원해 줄게."

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별안간 프랑스를 가고 싶다던 딸을

혹여나 못 보내줄까 봐 전전긍긍하다,


2013년 2월 공항 입국 심사대 앞에서,

처음 멀리 보내는 딸을 앞에 두고는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떨어져 지낸 1년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사이가 좋았다.


엄마가 자주 하던 말,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이 갈린다."

근데 실제로 안 보고 사진, 영상으로만 접하니 얼마나 친했겠냐며.


그리고 이 좋은 사이는 귀국하자마자,

파스스 날아갔다.


엄마는 여전히 단단하고 강했으며,

나는 엄마한테만큼은 이기고 싶은 못난 심보가 자꾸 고개를 들었다.


정말 답이 없던 우리 모녀 사이는,

내 나이 31살을 기점으로 확연히 달라졌다.


독립을 선언하고, 내 공간이 생기고,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하는 사이’가 되면서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위하기 시작했다.




그즈음부터,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내게 좋은 추억이 많듯,
엄마에게도 그런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걸.


어릴 적부터 전국 방방곡곡 날 데려 다니던 엄마.
둘이서 차를 타고 산이며 바다며,
여기다 싶으면 숯불 화로를 꺼내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잠은 찜질방에서 자며, 그렇게 둘이 함께 떠돌던 날들.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좋은 기억을 줄 차례였다.
에어비앤비가 생긴 뒤로는 생일마다 숙소를 예약해 함께 떠났다.
아이처럼 기뻐하던 그녀의 반응.

"너무 좋다."를 연발하며, 별것 아닌 것도 어찌나 자랑하고 다니던지.

“더 좋은 데 데리고 가줄게.”
나는 해마다 떡하니 약속을 걸었다.


그러던 중, 2022년 9월.
그녀는 폐암 선고를 받았다.


나는 혼자였고, 막막했다.
수소문 끝에 병원을 잡고, 최대한 빠르게 수술을 진행했다.


2주 만에 수술대에 오른 그녀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머리가 불편할까 봐 양갈래로 묶고는 나에게 웃음을 선사하더니,
나올 때는 파김치가 된 듯 축 늘어진 모습으로, 나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지금은 항암 3년 차.
다행히도 표적 항암약만으로 치료 중이고,
그녀는 여전히 묵묵히 잘 버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엄마도 많이 달라졌다.
자기주장을 앞세우기보다
“어떻게 하면 우리 딸이 좀 더 편할까?”
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우리 사이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엄마는 내가 아는 암환자 중 가장 잘 먹는다.
집에만 있으면 먹고 또 먹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을 놓는다.





늦기 전에 결심했다.
엄마도 해외를 제대로 즐겨봐야 한다고.


엄마에게 약속했다.
“이제는 엄마 차례야. 해마다 한 번씩 해외 가자.”

(참고로, 처녀 시절 다도 배우러 일본 한 번 다녀온 게 유일한 해외여행이다.

그 이후로는 전무후무했다.)


그렇게 정한 첫 여행지는 베트남 나트랑.

솔직히,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나도 처음 가보는 낯선 곳인 데다,

그녀는 약을 먹어야 하니, 식사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했고


도대체 과일은 왜 그렇게 먹고 싶은지,
올 인클루시브 호텔이라 하루 세끼 뷔페가 나오는데도
기어이 롯데마트를 찾아 과일을 사러 가겠다며
혼자 밖으로 나가버렸다.

후...


말 안 듣고, 고집 세고, 눈치도 안 보는
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여행 온 기분.
불안 불안하고, 조마조마하고.


'이래서 부모님과의 여행이 어렵구나..'

그렇게 실랑이도 하고,
언성도 좀 오간 그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우리가 이번에 어디 다녀왔는지 아세요?”
하며 자랑을 시작하는 엄마를 보고는,


그래... 또 가쟈... 가야지...






그리고 방콕에서 돌아온,

그 미운 딸이


목욕탕 안에서, "엄마 크루즈 여행을 봤는데 말이야, 2월에서 4월이 제일 가성비래. 내 년에 가자!"

그 말에, 또 홀랑 넘어간 그녀.






이제 우리 엄마는 누가 뭐래도 내 편이다.

물론 가끔 “시집은 어떻게 갈래!” 하며 잔소리 폭격을 날리긴 하지만,


언니 같고, 친구 같고,

어쩔 땐 동생 같기까지 한 우리 엄마.

같이 늙어가며 추억을 쌓는 지금 이 시간이,

나는 참 좋다.


나는 행운아다.

그녀와 함께할 수 있어, 진심으로 행복하다.





그치만, 엄마.
우리 이제 ‘분리 연습’도 좀 해봐야 해.
내 맘은 내 맘이고, 엄마 마음은 엄마 마음이잖아.

우리 팀플레이의 핵심은 뭐다?
‘따로, 또 같이’
알지?


사랑해.

그러는 의미에서, 일단 이모랑 베트남 먼저 갔다 오는 게 어때?..^-^

겨울엔 꼭 크루즈 여행 가쟈.

그리고 우리 같이 노력하자, 안 싸우기 위해서..

화이팅!


하뜌하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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