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야 꺼내보는 마음 하나
아빠, 그날 있잖아.
일주일 전쯤이었나,
내가 영화 보고 나오는 길에
아빠가 밥 같이 먹자고 했을 때 말이야.
그때 내가,
20분 기다리기 싫어서 그냥 집에 간다고 했던 날.
그날 우리가 밥을 먹었더라면,
내 마음이 조금은 편했을까?
나는 그냥, 그 상황 자체가 싫었거든.
우린 떨어져 지내고,
아빤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엄마는 생계를 이어가는 모습이 정말 싫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나도 조금씩 나이를 먹어 가니까,
아빠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되기도 해.
그래도 말이야,
내가 그 어린 나이에 우릴 두고 가버린 건
너무 나빴어.
그럼에도 보고 싶다.
처음으로 말해보는 거네.
사랑해.
우리 아빠는 진짜 멋쟁이였다.
멋에 사는 남자.
패션 센스는 딱히 없었다.
매일 양복만 입는, 고리타분한 남자였으니까.
그런데, 사상이 섹시한 남자였다.
불의를 못 보는 사람.
자기가 바꿔야 한다고 믿는 사람.
태어나 보니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정치인이었다.
시장과 국회의원 후보에 8번이나 나왔던 그런 사람.
경상도 진보 불모지에서,
혼자 전라도에서 5.18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고 연설하다 체포되고,
세상을 좀 더 정의롭게 바꾸고 싶어 했지만
보수 정권 후보자들에게 밀려
8번이나 패배하고도 의지를 꺾지 않았던 사람.
시장이나 유세거리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항상 기억해 주던 그 이름, 그 소리.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아빠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등에 나를 태우고 흔들흔들,
아빠 발등에 내 발을 올리고 블루스를 추고,
올챙이를 사 오면 우물에서 길러온 물로 물갈이해주며
앞다리, 뒷다리 관찰하다가 개구리로 방생해 주고,
같이 영화도 보고, 배도 타고.
해운대 백사장에서 사람들은 물놀이에 한창인데,
양복바지를 걷어 올리고
저 먼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런 낭만이 있는 남자였다.
이런 명예를 좇는 남자를 만나
우리 엄마는 무척이나 고생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다음 생에도 아빠를 만날 거라며
엄마 인생에서 남편은 아빠 하나면 족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건 무슨 대단한 사랑이야, 정말.
그러던 아빠가
계속되는 실패를 감당하지 못하고
점점 술에 빠져 살던 모습,
괴로워하던 그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는 정말,
‘술이 뭐길래 아빠가 저렇게 되나’ 했는데,
지금 보니,
사람이, 세상이 펼치고자 하는 바를 알아주지 않을 때 오는
그 괴리감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어른이었다면,
같이 술 한 잔 해 줄 수 있었더라면.
"아빠는 왜 그렇게 술을 마셔?
뭐가 그렇게 힘든 거야. 말해봐."
이렇게라도 말해보고 싶지만,
다 지나가 버렸으니까.
그래도,
자신을 컨트롤하는 법을 배웠다면,
지금쯤 둘이서 데이트도 하고
술도 한 잔 하면서
또 다른 추억을 쌓았을 거 아니냐며...
그런, 불가능한 상상을 해본다.
아빠가 일찍 가서,
내 이상형은 ‘오래 내 곁을 지켜주는 건강한 남자’로 바뀌었어.
알아?
근데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던 술 말이야.
왜 그렇게 마셨나 했는데,
먹어보니까,
기분 좋아지긴 하더라.
바보야,
그러니까 그 쓰디쓴 깡소주 말고,
와인도 마시고, 위스키도 음미하면서
좀 즐기면서 살 수도 있었잖아.
엄마랑 자주 이야기해.
아빠는 바보라고.
좋은 시절 다 놔두고
그렇게 빨리 가기 있냐고.
아무튼,
그럼에도 우리는 잘 지내고 있어.
누구 와이프에 딸인데,
세상 잘 즐기고 있으니까 걱정 마.
아빠 뜻대로,
더 좋은 사람이 돼볼게.
초롱불처럼,
사람들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사람이 되어볼게.
진짜로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