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아무에게도 진짜일 수 없다.

못된 사람과 단호한 사람 사이 어딘가에서

by 홍고롱


예전에 꽤 신선한 광고를 본 적이 있다.

모두가 YES를 외칠 때, NO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땐 “와, 멋있다!” 싶었는데
막상 현실에선… 내가 그 YES 무리에 끼어 박수 치고 있는 사람이더라.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커질수록
‘아니요’라는 말을 하는 게 무척 어렵다.


거절을 하면 나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사람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배제될까 봐 괜히 눈치를 보게 된다.

그렇게 나는 꽤 오래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며 살았다.






그 시작은 아주 가까운 곳, 친척들이었다.
가깝다면 한없이 가깝고, 멀다면 끝없이 멀 수 있는 사람들.

명절마다 정기적으로 마주치고,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빠짐없이 소식을 공유하게 되는 관계.


아빠가 돌아가신 뒤,
나는 마치 아빠 대신 살아야 할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빠의 몫까지, 엄마의 짐까지 조용히 끌어안은 딸.
누가 시킨 건 아니었지만,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자연스레 “애어른 같다”는 말을 들었고,
성숙한 척, 우리 집안을 떠받치는 사람인 척
더 좋은 학교, 직장, 결혼이라는 기대를 고스란히 끌어안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겨우 열몇 살, 아직은 그냥 아이였는데,

삶의 무게를 어깨에 잔뜩 얹고
어른인 척, 괜찮은 척 살아냈다.


사춘기는 조용히 지나갔지만
오춘기, 육춘기, 칠춘기…
지금도 여전히 '나는 누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붙잡고 있다.


돌아보면,
나는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에 더 몰두하며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아도 되는 걸까?”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질문들 사이에서 늘 흔들렸다.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나’와,
사회가 정해놓은 타이밍에 맞춰 움직이려는 ‘나’가

내 안에서 늘 부딪쳤다.

지금도, 여전히.





직장, 결혼, 육아, 성공…
우리는 어쩌면 비슷한 인간인데,
각자의 자리에서 어른인 척, 가장인 척, 괜찮은 사람인 척—
누구보다 열심히 ‘역할놀이’를 하고 있다.


나도 그 틀 안에서 한참을 버텼다.

그러다 결국, 품고 있던 것들을 하나둘 내려놓게 되었다.


그렇게 잘라낸 관계들 속에서도

나를 꾸준히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내가 다시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들은,
늘 그런 예상 밖의 따뜻함에서 왔다.


아마도,
자신의 취약한 부분까지 기꺼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자연스레 무장 해제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버티고 있겠구나.


겉으로는 어른인 척 단단해 보여도,
누구나 아이 같은 모습이 있고,
그런 내면을 받아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비로소 세상이 조금은 살 만해지는 거겠구나.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찬찬히 더듬어보니,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단 하나였다.


싫다고 말하지 못한 나.


"사실은,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닙니다."
그 말을 단호하게 꺼낼 수만 있었더라면,
원하지 않는 일을
의무감으로 억지로 감당하는 순간도
조금은 줄었을 것이다.


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나는 결국 내 이미지를 스스로 갉아먹고 있었다.


꼭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거절이 어려워서 맞이한 만남들이 있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자리에 나가선

돌아와서 괜히 내 시간을 탓하고, 스스로를 갉아먹곤 했다.

그건 참, 내게도 상대에게도 불필요한 일이었다.


사실,
그럴 땐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보기 어려울 것 같아요.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튜브에서 본 ‘예쁘게 거절하는 법’에 따르면
먼저 불가능하다는 걸 밝히고,
뒤에 감사를 붙이면
좀 더 부드러운 인상이 된다고 한다.)


이 말 하나를 못해서

하루치 에너지를 다 쓰고 돌아온 날이 적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소비였을까.

그 한마디만 했으면 됐을 텐데—

결국엔 나부터 지쳐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누가 연락 오면,

일단 폰을 내려놓고 1분쯤 숨을 고른다.

읽음 표시가 뜨는 순간,

나는 또다시 ‘예의력 만렙 모드’를 켜게 되니까.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나는,

결국 나에게도 남에게도 진짜일 수 없었다.






최근에는
거절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아직도 익숙하진 않다.
예를 들면, 엄마에게 단호하게 말하기 전—
“어떻게 말하면 너무 상처 주지 않고 내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
매번 챗GPT에게 물어보는 나.


하지만 그만큼 분명해졌다.

제대로 거절하지 못한 대가가,

늘 내 시간과 감정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관계의 밀도는 다르고,

건강한 관계는, 결국 자기 깜냥을 아는 사람만이 만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거절하는 연습과

거절당하는 연습을 함께 하고 있다.


내가 뭔가를 제안했을 때,
상대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젠 조금씩 받아들이는 중이다.


그럴 땐 그냥, 혼자 하면 된다.
처음엔 좀 서운하지만,
혼자 하는 데 익숙해지면
나중에 함께할 수 있을 때 그 즐거움이 배가 된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세뇌 중이다.


‘거절을 잘하려면, 거절당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거절을 덜 겁내게 되면,
비로소 내가 주도하는 삶이 시작되니까.



이제는 NO도 YES처럼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진짜 YES는—

내 마음이 정말 그곳을 향할 때만.)

그래야, 진짜 중요한 관계에

진짜 내 마음을 쏟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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