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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Mar 24. 2019

일단 걷는다

그게 4시간 반이 될 지라도

걷는 걸 좋아하게 된 건 순전히 잠 때문이다. 재수생 시절 밤에 잠이 안와서 미쳐버릴 것 같은 때가 있었다. 낮에는 하루종일 멍한 채로 다니다가 밤만 되면 오늘같은 날이 계속될까봐 두려워서 잠들지 못했다. 정말 격한 운동을 하기에는 체력이 바닥이었고, 그래서 하루종일 걸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놀러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그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지하철로 세 정거장 떨어져있는 바닷가도 한바퀴 돌았다가, 바닷가에서 좀 더 벗어난 곳도 가봤다. 대학생 때는 술을 먹고 냄새를 좀 빼고 집에 들어갈 겸 항상 집에 도착하기 두 세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걷다가 뛰다가 하면서 집으로 갔다.


대학교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고 있을 때 이름과 학번 외에는 아는게 없어서 아무것도 안쓰고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내 쪽으로 오시더니 귀에다 대고 F를 주겠다고 친절하게 속삭이는 교수님의 경멸 어린(?) 표정을 보고 시험지를 제출하고 폰으로 휴학신청을 한 다음 미친듯이 걷기 시작했다. 오후 3시 반부터 시작된 나의 일탈은 거의 오후 8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지하철로 4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걸었을 때의 뿌듯함과 미련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만원짜리 슬립온은 그날 다 닳아서 고무밑창과 신발 천 부분이 떨어져 있었다. 깔창은 깔창대로 보풀이 풀풀 날렸다. 학교를 갈 필요가 없어진 다음날, 나는 꼬박 10시간을 잤다. 자고 일어나서 벌겋게 부은 발바닥을 주무르면서 아프다는 것이 느껴지니까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살고 싶었다. 밥도 먹고 목욕탕에도 갔다가 영화도 보고 기타도 쳤다. 실컷 놀다보니 하고싶은 일이 생기고 죽는 건 좀 미뤄두고 싶었다.


문득 그날이 생각나서 오늘도 좀 걸었다. 오전부터 인수인계 받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아직까지 포기를 입밖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다. 할 줄 아는 일이 없어서 자괴감 들고 자책도 하겠지만, 결국은 내가 버틸 수 있는만큼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걷고 자고 먹고 그러면서 사회인으로 쑥쑥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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