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랑을 고찰하다

사랑을 배우다

by 지니샘

AI가 이런 것도 하네! 앉아있다가 놀라는 경우가 많다. 터치 몇 번에 자동으로 생성시키는 AI 기술 때문이다. 여러 방면에서 그의 위력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오늘도 넣기만 하면 다듬어진 문장, 창조된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며 첨단 기술이 못하는 것에 주목했다. 기술이 배울 수 없는 건 무엇일까, 사실 나는 이야기를 꺼내기 이전부터 답을 알고 있다. 사랑이다.


기술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 속에서 “물질성을 가진다는게 의인화 시킨다는 말은 아니고” 모든걸 사람 같이 보는게 아니라는 교수님 말씀이 떠오르자마자 바로 접었다. 끄트머리에 기술이 사랑까지 해버리면 우린 어떻게 살라고 라는 재미난 이야기를 집어넣긴 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지금은 기술의 사랑을 재미의 요소로 보고 있지만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세상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범주로 변해 있는 후 일 것이다. 변화와 상관없이 그렇게 되면 안된다! 그럼 사랑은 생명체의 고유한 특성인 것인가. 그것도 of course 그렇다고는 할 수가 없다. 잘 모른다. 그치만 생명체는 사랑한다. 사랑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진다.


사랑하고 있다. 생명체의 하나로서 나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어떻게든 사랑하고 있다. 길가를 지나가다 만난 풀도 사랑하고 가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흘리는 엄마도 사랑한다. 나의 사랑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상큼해진다. 코를 간지럽히는 바람이 내 앞에 살랑 다가온 것만 같다. 사랑은 그렇다. 떠올리는 관념적인 것으로도 마음이 충족된다.


나는 사랑하는 것들에게서 사랑을 배운다. 나 스스로가 사랑을 주고 있다는걸 크게 완벽한 증거로 느낄 수 없고 증명할 수 없지만 나 또한 사랑을 준다. 사랑을 주지만 사랑을 배운다. 배움이 더 커서 주는 것보다 더 쉽게 보인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은 또 다른 말인데 나는 일단 사랑을 배운다.


나의 사랑 스승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마음 저편에 갔다오거나 꼬옥 들여다 본 것은 아니지만 나보다 한 차원 높은 사랑을 한다. 차원을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아이들이 스승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생각에 불순물이 많은 나와는 달리 표시나게 천진한 그들의 사랑을 보며 정의의 용사처럼 불순물을 헤치고 나도 받은 만큼을 돌려주고 싶어진다. 꼭 편지를 써주거나 말을 해주거나 안아주지 않더라도, 물론 표현을 하면 더욱 사랑이 느껴지기는 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나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배운다.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심층적인 물질성이 느껴져서 그런가보다. 제약있는 세월을 함께 하는 우리로서 못해준 사랑이 아쉽다. 이런 내 마음들을 모아 후에 아이들에게 주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나의 사랑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이는 또 있다. 소리 안들리면 짖다가 “가실아” 이름을 부르면 나인걸 알고 펄펄 마당을 뛰어다니며 나를 바라보는 가실이. 가실이의 애교 가득한 사랑을 만나며 나의 사랑 학습이 깊어짐을 느낀다. 내 스스로의 사랑 차원이 이동함을 알아차린다.


다른 요인들도 많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의 사랑을 말하고 싶다.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부모님,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절로 느끼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너무 슬퍼질 것 같아 오늘은 슬프지 않은채로 마무리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호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