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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좋아

스케치

by 지니샘

어릴 적부터 미술학원을 다녔다. 노란색 크레파스로 네모바지 사람을 그리고, 칼로 깎아야 미술하는 느낌이 나는 연필로 손옆이 까매질 때까지 그렸다. 채색이 들어가기 전 스케치라는 건 언제든지 지우거나 덮을 수 있었다. 스케치가 끝난 후에는 선생님들이 와서 나의 기술적인 부분을 봐주시곤 하였다. 그럼 나는 저렇게 하면 더 사람 같구나, 나무는 저렇게 그리는 거구나 하고 혼자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다음 작품 스케치를 할 때 따라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크레파스도 연필도 그림을 그리기 위해 딱히 잡을 일이 없다. 나의 부족함을 보완해주시던 선생님들도 옆에 있지 않다. 그치만 나는 스케치한다. 이제는 혼자서 말이다.


좋은 점은 그거다. 유동성이 있는 것. 변형 가능하다는 것. 그 상태 그대로 정해져 있지 않고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자체가 나는 좋다. 세상에 많은 것들을 정해두고 사는데 스케치는 언제든지 새로운 방향으로도 갈 수 있을거란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기 위해서 스케치를 하는 목적도 있고.


자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를 스케치 한다. 분단위로 시간대별로 해야 할 것들이나 갈 곳을 정해놓을 때도 있고, 크게 크게 해야 할 것들만 적어서 체크할 수도 있다. 이를 계획이라는 말보다 스케치라는 말을 붙이고 싶은 이유는 달라져도 좋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달라지면 오히려 더 좋다. 어떤 작품이 완성되기 위한 시작에서 아니 중간이라도, 어쩌면 끝까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작업이나 상태가 나를 요리조리 움직이게 하고 꿈꾸게 한다. 크레파스는 지울 수 없으나 덮어지다 우연한 선들이 만나 나는 생각치 못한 또 다른 기회를 지을 수도 있다. 연필과 지우개의 만남 속 덩그러니 남은 흔적이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 될지도 모른다.


경계하는 건 나의 쪼다. 무엇을 하든 한 번 더 해버리면, 그러다 계속적으로 실시해버리면 나만의 루트가 생긴다. 반복이라는게 안정감을 주긴 하지만 짙어져 똑같은 스케치가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영영 완성되지 않을지 모르는 나라는 작품 속 오늘의 스케치는 글을 쓰며 쪼가 생겨버린 나를 발견하고 어디를 지워볼까 지우개를 들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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