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주 하는 선택 중 하나가 경조사에 갈지 말지와 부조금을 얼마 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직접 찾아가 애도의 뜻을 표하면 좋겠지만 장례식장이 지방에 있거나 내 상황이 여의찮아 못 가게 되면 마음이 상당히 불편하다. 친분이 꽤 있어서 특정 금액 이상으로 고민 없이 부의금을 하는 때도 있지만, 가끔은 좀 더 할지 덜 할지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최근 지인의 모친상이 있었다. 평소 집에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T맵에 찍어보니 퇴근길 차량 정체로 1시간 20분 이상 소요될 예정이었다. 막히는 도로에 있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기도 하고 저녁 시간을 온전히 다 할애해야 한다는 생각에 망설여졌다. 부의금만 보낼지 살짝 고민하며 일단 집으로 향했다.
식사를 서둘러 준비하고 아이들과 즐겁게 저녁을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졸음운전은 절대 안 된다는 철칙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어, 가지 않아도 될 이유가 하나 더 보태졌다. 하루의 피로가 온몸으로 퍼진 상태에 식곤증까지 몰려오니 나는 스스로 타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인과의 의리가 이겼다. 장례식장에 갈 채비를 마치고 저녁 8시 30분쯤 집을 나섰다.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체증이 풀려 35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그제야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서울 시내를 벗어나 경기도 부천으로 향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빈소를 갈지 말지에 대한 단순한 결정이 아니었다. 부의금을 보낼지 직접 갈지, 집에 들렀다 갈지 말지,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 갈지 말지, 졸음을 참고 갈지 말지, 지하철로 갈지 자동차로 갈지 등 여러 선택의 합이었다.
빈소에 도착하니 초췌한 상주가 조문객 A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밤 10시가 안 된 시간이었지만 내가 마지막 조문객이었다. 상주는 나를 A와 합석을 시켰다. A는 상주의 직장 선배였고 지금은 퇴직하여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빈소를 지키는 지인의 애잔한 마음에 동화되어 한참을 대화하다가 일어서는데, A가 나에게 훅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오셨어요? 지하철로 가시나요?”
“아. 차를 가지고 왔어요.”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아, 그러면 저 좀 태워주실 수 있어요? 댁이 어디세요? 저는 대방역입니다.”
순간 너무 난처했다. 나는 집에 일찍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덜 막히는 시간을 고려하여 움직였고,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는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포예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렸는데도 나의 대답을 종용하는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저는 T맵만 켜고 다녀서 지리를 잘 몰라요”
나로서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살짝 돌아가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헉. 이건 뭐 답정녀 스타일의 화법이었다. ‘어렵겠는데요.’라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순간 상주의 얼굴을 쳐다봤다. 선배를 데려다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이럴 때는 정말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조금 더 지체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억지로 해주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다.
“네. 돌아가지만 들렀다가 갈게요.”
억지춘향이 따로 없었다. 타인에게 저렇게 부담 주는 말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A는 대방역이 아닌 그녀의 아파트 입구에서 내렸다.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훌쩍 넘었다. 30분이면 족히 왔을 거리가 1시간도 넘게 걸렸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선택’이라는 나의 자유 의지가 있다. 그녀의 화법에 당한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었지만 함께 이동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그녀는 연신 감사함을 표했다. 태워주기로 한 약속을 번복할 수는 없기에 나는 그녀와 즐겁게 대화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녀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았다. 친정어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때, 하필 고약한 상사를 만나 더 버티지 못하고 팀장으로 퇴직했다. 그녀가 폭포처럼 쏟아내는 이야기를 들으며 ‘대화를 나누면 그 사람의 일생이 온다’라는 말이 실감 났다.
집으로 바로 못 가고 돌아가는 것은 불편했지만 그 불편을 뛰어넘는 생산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대기업 팀장으로 퇴직한 그녀는 현재 팀장으로 재직 중인 나와 주고받을 공감 코드가 꽤 많았다. 1세대 팀장 세대로 고군분투했던 지난 이야기를 들으니 현재 나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은 정도였다. 태워줄 때만 해도 이런 좋은 대화가 오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매 순간 선택을 잘하려고 노력하지만, 잘한 선택이었는지 여부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과거에 벌어진 일을 바꿀 수는 없어도 그것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예상치 못한 A의 카풀 요청. 외면할 수 없는 상주의 눈빛에 등 떠밀려 결국 A를 데려다주게 되었다. 코너로 몰린다는 생각이 들 때면 파도에 몸을 맡기듯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도 방법이다. 파도가 휩쓸려 오면 그 파도에 몸을 맡겨야지 거스르려고 하면 크게 다칠 수가 있다.
태워달라고 요청하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의사결정 회로가 작동했다. 태워줬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장단점을 내 성격과 접목하여 빠르게 시뮬레이션했다. 태워주면 몸은 피곤하고 집에는 늦게 가겠지만 내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다. 반면 그냥 바로 집으로 갔다면 상주의 눈빛을 외면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이럴 때는 그냥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도 괜찮은 것 같다. 뭐가 더 유리한지를 놓고 의사결정을 할 때도 있지만 내 마음이 덜 불편한 쪽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다.
Key Message
1. 자극과 반응 사이에 ‘선택’이라는 우리의 자유 의지가 있다.
선택할 때는 내가 바라는 최종 목표에 부합하는지 먼저 검토해야 한다.
2. 과거에 벌어진 일을 바꿀 수는 없어도 그것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3. 마음이 편한 쪽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는 유불리를 따지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