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직장을 다니셨지만 자녀 공부에 열의가 있었던 엄마는 고3 올라가는 언니에게 동생들 데리고 영어학원에 가서 방학 특강을 등록하라며 학원비를 주셨다. 두 살 터울인 오빠와 나는 언니를 따라나섰다.
35년 전 이었음에도 1988년 12월 말의 그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학원에 들어서자마자 등록 데스크의 여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열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피곤함에 지친 얼굴에 짜증만 가득했다.
“정원이 다 차서 등록이 안 됩니다.”
그녀는 우리를 향해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표정으로 건조하게 말했다.
언니와 오빠는 ‘어떡하지’하는 난감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영어 배우겠다는데, 의자 하나 더 놓으면 되지. 학원도 돈 벌면 좋잖아. 한 명 더 듣는다고 영어 선생님이 그렇게 힘들겠어!’
“1명씩 더 등록해 주면 안 되나요?”
“정원이 다 차서 안 됩니다”
몇 차례 대화가 오고 가는 중에 오빠는 등록을 포기하고 학원을 나가버렸다. 평소 나에게 ‘야무지다’라고 자주 말했던 언니는 나의 레퍼토리를 예상이라도 한 듯 나와 데스크 직원 간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나는 등록 데스크 여직원의 말이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8학군이라고 해도 클래스당 3~4명 모집하는 것도 아니고 10명 내외로 모집하는데 추가하는 게 뭐가 어렵다는 거지?’
몇 차례 더, 부드럽게도 강하게도 요청했지만 계속 불가하다고 하니 거부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학원이 여기밖에 없나?’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그제야 학원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나는 언니와 함께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학원에서 집까지 걸어서 고작 15분 정도의 거리가 그때는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한겨울 찬 바람을 실컷 맞아 얼얼해진 코끝마저 서러웠다.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직원을 흉봤지만, 머릿속으로는 영어 공부를 어디서 해야 할지 걱정되었다.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의 나는 분명 그 직원에게 ‘원장님께 여쭤봐 주세요.’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등록 데스크 직원도 지침을 따랐을 뿐이니 실제 의사결정권자에게 물어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더 적절했다. 나야 그때 중1이었으니 몰랐다고 하더라도, 어른이었던 데스크 직원은 왜 상급자에게 물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집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학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등록해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우리의 대화를 영어 선생님이 들으셨고, 배우겠다는 열의가 있는 나만 추가로 등록시키라고 했단다.
‘지성이면 감천이구나!’
지금 돌이켜 보면 꼭 등록하고 싶다는 그런 열정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어려서부터 내가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드러내는 말과 행동에 거침없었다.
난생처음 영어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다. 눈이 매우 큰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분의 성함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TV는 사랑을 싣고’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나에게 영어를 제대로 알려준 그 선생님을 찾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숙제에 대한 꼼꼼한 피드백과 남달랐던 영어 교수법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이 ‘잘한다, 잘한다’하니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영어 기초를 잘 다지고 나니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제대로 붙었다. 여기에 잘 하고 싶은 욕심까지 더해지자, 실력도 일취월장이었다. 영어시험만큼은 고3까지 1~2개 이상 틀린 적이 없었다. 영어 문법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과외 할 정도의 수준은 된다.
직장에서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상대가 알겠지’라거나 ‘안 될 거야’라고 지레짐작하며 표현을 아끼는 경우가 많다.
위기관리보다는 문제 해결이 더 중요하다. 27년 직장생활의 노하우 중에서도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위기관리는 예방의 차원에서라도 위험 요소를 다각도로 검토하여 줄이거나 이전시키거나 없애야 한다. 반면 문제 해결은 사후 처리에 더 무게를 둔다. 발생한 문제는 최선이든 차선이든 해결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인생은 복잡계이다. 어느 부분에서 방향과 속도가 달라질지 모른다. 35년전 때마침 그 순간 영어선생님이 나와 직원간의 이야기를 들을 줄 이야.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자신 있게 밝혀라. 그 이후의 영역은 나의 컨트롤 영역이 아니다.
Key message
1.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표현하는 연습을 해라. 연습은 반드시 보상한다.
2. 문제 해결의 Key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라.
그 사람에게 나의 요청 사항이 전달되게끔 하라.
3. 원하는 것을 표현한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복잡계의 힘을 믿어라. 의외로 좋은 결과가 자주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