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낼 참이었으나 기한 내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출근했다. 휴가일에는 컴퓨터 접속이 차단된다. 나는 관련 부서에 협조를 구하고 시행문을 작성하고 나서야 내 PC에 접속할 수 있었다. 급한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덧 오전 11시 30분이었다.
아뿔싸! 점심시간인데 약속을 잡지 않았다. 자투리 시간이 생긴 김에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최근 몇 달 동안 쏟아지는 일거리를 제때 잘 처리하는 것에 급급했다. 성과는 보통 이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왠지 헛헛한 마음이다. 회사형 인간으로는 후한 점수를 주겠지만 ‘나’라는 개인에게는 불만이 많다. 일거리에 기운이 다 빨려서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비리비리해졌다. 너무 지쳤다. 산책하면서 ‘뭐가 문제일까?’ 생각하다가 결론 위주로 질문을 바꿨다.
‘지금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나 스스로 어떤 상태가 되기를 원하는가?’
‘마음이 평온하고 여유 있는 상태가 되고 싶다.’
마음이 평온하고 여유 있는 상태란 무엇일까?, 자문하다가 생각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 질문을 다시 바꿔보았다.
‘나는 언제 마음이 평온하지 않지?’
생각해 보니 최근의 일이 떠올랐다. 타 부서와 불협화음이 일었다. 우리 부서 과장 A의 실수였다. 나는 즉시 관련자 전원을 한자리에 불렀다. 내가 원인을 지적하니 과장 A의 얼굴에 불편함이 드러났다. 일부러 티를 내려는 의도는 아닐 텐데 A는 감정을 얼굴에 다 드러내곤 하였다. ‘내 잘못도 있지만 과장 B의 잘못도 있는데 왜 나만 지적하시지?’, 라는 억울한 눈빛이었다. 이럴 때마다 도대체 눈높이를 얼마나 낮춰 소통해야 하는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과장 A는 도대체, 왜, 무엇이 억울한 걸까?
관련자들 앞에서 나는 B의 잘못도 언급했다. 가장 큰 문제는 과장 A와 과장B의 소통 부재였다. 서로가 하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업무를 방치한 안일함이 원인이었다. 인사결정권자인 임원께 나는 그동안 과장 A에 대해서 좋게 어필했었다. 그런데 최근 업무 태도를 보며 실망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과장 A가 본인 잘못보다는 과장 B의 잘못이 크다고 주변에 말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후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나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관련자 전원이 모인 미팅 후에 과장 A를 따로 불러 1:1로 알아듣게 설명했다. 내 앞에서는 분명 알겠다며 수긍했다. 과장 B의 잘못이 크다는 식의 첨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내 바로 밑의 부장, 과장 B, 과장 A가 함께 참석한 자리에서 일자별로 적확한 사실을 보고받았다. 이 세 사람과 나는 이미 정확한 원인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과장 A도 내 앞에서만큼은 과장 B를 언급하거나 본인이 억울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던 거다.
과장 A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안타깝다. 과장 A를 동기부여 시키고 향후 CDP를 함께 고민하고 노력했던 그간의 내 시간과 에너지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여전히 상황의 본질을 모르는 과장 A는 앞으로 성장이 더디겠다 싶다. 직원들의 장점을 보면서 함께 일하려고 노력한 내 자신에게도 제동이 걸렸다.
팀장은 직원의 성장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코칭하고 피드백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내가 응대하는 직원의 숫자였다. 직원 한 명 한 명을 따로 코칭하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지나친 감정 소모가 임계점을 넘었다.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직원 모두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의 성장을 위해 고심하는 훌륭한 리더가 되고 싶지만, 효율과 생산성에 중심을 두는 부서장이 되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자문했다.
나의 리더십 역량의 한계일 수도, 지금껏 나 혼자 이론적인 것을 실행하느라 에너지를 허비한 것일 수도 있다. 원래는 사원들에게 팀장과 개별 미팅을 하면서 언로를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과연 그게 의미가 있나? 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코칭하는 것은 양측 모두에게 시간 낭비다. 나는 코칭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지적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생각이 딱히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날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업무처리 결과를 메일로 보고하겠다고 지난주에 말했는데 나는 그 메일을 받지 못해서, 사원 C 및 관련자들에게 자초지종을 묻는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보내고 2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사원 C에게서 본인이 실수했다는 솔직한 내용의 메신저가 왔다. 그리고 C는 곧바로 메일로 관련자 전원에게 업무처리 결과를 업데이트했다.
그녀는 실수가 있었으나 후속 처리가 훌륭했다. 그 부분을 칭찬해 주고 싶어 그녀에게 격려 및 코칭의 메일 한 통을 짧게 보냈다.
OO님, 일하다 보면 깜빡할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오늘 OO님의 소통 방식을 칭찬합니다.
상황설명을 메신저로 먼저 하고, 메일로 내용 공유까지 소통을 참 잘했습니다.
놓치고 나서, 후속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데, OO님은 그 부분을 잘했어요.
놓친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후론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거든요.
오늘 인상적이었어요^^
산책하는 내내 코칭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결론에 닿아 마음이 무거웠는데, 조직장은 직원의 성장을 도와야 한다는, 지금껏 내가 줄곧 지켜왔던 미션 때문에 메일을 보냈다. 평소 이런 코칭을 자주 하므로 상기와 같은 팩트 중심의 메시지 전달이 나는 어색하지 않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나는 사원 C로부터 엄청나게 황송한 메일을 받았다.
업무처리 보고를 메일로 회신하지 않아 답답하고 신경 쓰이셨을 텐데
먼저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팀장님.
언제부터 이렇게 업무에 솔직히 임할 수 있었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전에 OO 업무 관련하여 문제가 있었을 때 팀장님께서 제게 ‘솔직하게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현명하다’라고 피드백을 주셨을 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실수하면 언제나 혼이 날 각오를 하고 말씀을 드리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좋게 말씀을 해주시는 팀장님 덕분에, 제가 업무를 더 정직한 마음가짐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만 같아도 온전한 제 실수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격려 메일까지 주시다니, 회사 생활을 하며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사람 한 명 한 명을 돌아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모든 팀원에게 최대한 공평하게, 기회를 균등하게 주려는 나의 선한 의지는 책에서나 나올법한 이상일지 모른다. 이상적인 것을 실제로 3년 가까이 실행해 오면서 성장 발전하는 일부 직원들로 인해 성취감과 나의 자존감이 올라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계속 실행하기에는 시간과 에너지의 한계, 일부 직원들의 태도가 팍팍하여 나의 마음과 감정이 너덜너덜해졌다. 나를 채근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자고 생각한 차에 위와 같은 메일을 받으니 ‘그 동안 나의 코칭이 효과를 발휘했다’라며 누군가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 신문사 기자와 저녁을 했다. 기자 5년 차인데 바로 밑의 후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끔 난감하다고 토로했다. Z세대인 기자가 말하길, 대학 동창들이 모이면 항상 본인들의 직장 선배와 상사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있단다.
‘제일 최악의 선배는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흉보는 사람이다. 앞에서 대놓고 혼내는 선배가 훨씬 낫다.’라면서 선배한테 뒤통수 맞은 경험을 말했다.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선배나 상사 입장도 똑같다고 말해 주었다. 기자는 동그랗게 키운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앞에서는 좋아요, 라고 말하고 뒤에서 뒷말하는 후배 싫어해요. 선배나 상사들에게 그런 이야기라면 어떻게든 들어가게 되어 있거든요. 결국 상사나 선배들도 다 알게 되는 거죠.”
“아. 정말 그렇겠네요. 저는 제 처지에서만 생각했네요.”
생산성과 효과를 고려하여 80:20의 법칙을 코칭에도 적용해야겠다. 앞으로 코칭 대상은 성장 욕구가 있고, 책임감이 강하고, 수용성이 높은 사람으로 인원의 20%만 선별하여 진행하고 결과를 지켜볼 생각이다. 그들을 잘 양성시키고, 육성된 그들이 다른 팀원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메커니즘이 형성되도록 말이다.
생각이 정리되니 머리가 좀 가벼워졌다. 회사에 가도 사람이 많고 집에 와도 아이들 챙기느라 혼자서 쉴 틈이 없다. 주중에는 업무로 치이고 주말에는 그 여파로 늘어진다. 온라인 커뮤니티 강의 준비 같은 꼭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생각할 시간을 갖자’라고 마음먹어도 즉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부모에게 안부 전화하는데 3분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그 3분을 통화에 할애하려면 적어도 20~30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생각할 시간은 예열의 시간이 더해질 때 비로소 나의 시간이 된다.
점심 산책은 나에게 보약 같은 시간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점심 약속 잡지 말고 산책을 나서야겠다. 생각을 예열하는 시간의 가치를 이제 알아버렸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