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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쌀 사러 가야 돼.”
아내의 말에 나는 힘없이 물었다.
“쌀 살 돈은 있어?”
“응, 있어.”
얼마 전 동양마트에서 쌀을 사온 것 같은데 너무 이른 감이 있다. 따로 주전부리 할 것이 없으니 다들 밥을 많이 먹는 모양이었다. 신정 때에는 내가 회사에서 받아 온 김으로만 보름을 넘게 먹었다.
“앞으로 나한테 며느리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만 있으면 가만 안 둘 거야.”
아내는 시부모가 여전히 못마땅한지 투덜거린다. 혼란스러운 나는 입을 다물고 있다. 부모는 부모고 자식은 자식. 우리는 서로 독립적인 개체이다. 자신의 일은 각자가 책임져야 하고 서로 기대거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내게 학교나 부모에게서 받아 온 교육이었다. 그런데 위의 것들과 성질상 다른 의무가 있었다. 자식이 부모에게 할 의무였다. 안부전화를 드리고, 제사나 명절, 생신 때마다 찾아뵙고 성의를 표하는 날이 이어졌다. 내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다면 이런 관계는 죽는 날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려움에 닥쳐 손을 내밀었을 때 부모님은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당신들 어렵게 모은 재산이 축 날까 두려워 내가 어렵다는 말을 하자마자 스스로 연락을 끊었다.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처가도 마찬가지였다. 장모님이 부탁할 때마다 우리는 큰처남에게 돈을 빌려주었지만 단 한 번, 보증을 서주지 못했을 때 사정은 물어보지 않고 아내에게 막말을 했다. 결국 양가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한 씨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 씨는 청소부였다. 아내가 죽은 후 혼자 딸을 키워왔다.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는 청소부였기 때문에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파출소 김 순경과도 서로 인사를 하며 덕담도 나누는 처지였다. 그는 부근에 있는 슈퍼 옆에 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오고 갈 데 없는 개를 자신의 집에서 키울 수 없어서였다. 그는 수시로 슈퍼 앞을 지나치며 게으른 가겟집 아저씨 대신 쌀가마나 무거운 짐을 들어주었다. 그때마다 가겟집 여자는 고마워했다. 그는 가겟집 옆 공터에 마련된 개집에 하루 몇 번씩 들렀다. 그는 개에게 한 끼도 거르지 않고 개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새벽 어스름 속에 그는 거리를 돌고 있었다. 어느 동네 모퉁이에서 그는 두 명의 청소부를 내려준 후 천천히 청소차를 몰았다. 쓰레기가 쌓인 곳에 차를 대려고 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꽝 소리가 났다. 무언가에 부딪혔을까. 그는 쓰레기통을 받은 것이 틀림하다고 생각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쓰레기통 옆에 한 사람이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흔들어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새벽운동을 하던 남자가 꽝 소리에 달려와 이 광경을 보았다. 뒤이어 두 명의 청소부도 달려왔다. 그는 처음에는 아무 것도 파악하지 못했다. 교통사고를 처음 낸 사람들처럼 어리둥절했다. 정말 청소차가 사람을 치었는지, 아니면 쓰레기통만 치었는지. 멍한 상태에서 그는 바닥에 떨어진 생선에도 눈길을 주지 못했다. 지금 같으면 CCTV나 블랙박스가 있어 사건의 전모를 파악했을 테지만 그런 것도 없던 때였다. 수사가 시작되었다. 직업의식이 투철했던 김 순경은 그를 용의자로 지목한 후 냉정히 대했다. 애초 그를 변호하려던 동료들도 김 순경으로부터 거짓 진술을 하게 되면 피해를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후 태도를 바꾸었다.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다고 진술했다. 슈퍼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게으른 남편을 대신해 무거운 짐을 들어주던 그를 위해 어떤 변호나 위로의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용의자로 지목되자, 그의 딸은 친구들 보기 부끄럽다며 그를 아버지로 둔 것을 창피해했다. 낙심한 그는 집안에 누워 있었다. 시청 청소과에서 당분간 출근하지 않아도 좋다는 통고를 받은 터였다. 그는 절망했다. 그를 도와주려거나, 처지를 동정해 주거나 가슴 아파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이었을까. 그는 마당에 놓인 동태 한 마리를 보았다. 이것이 왜 여기 있지? 이상하게 여긴 그는 동태를 집어 들었다. 누군가 갖다 놓지 않은 이상 동태가 있을 리 없었다. 동태는 몇 미터 앞에도 있었다. 그는 동태를 주우며 걸어갔다. 그것은 슈퍼 앞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는 슈퍼 여자에게 지금 동태를 파느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여자는 게으른 남편 욕을 해댔다. “아이구! 그 인간이 게을러서, 수산 시장에 가야 동태를 팔지요.” 이후 수사는 동태에 집중되었고, 사건 당일 슈퍼 남자가 수산물 시장에서 동태를 사오다가 사고를 낸 것이 확인되었다.
나는 웃으며 메가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혼잡했다. 2층에 겨우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서자, 혼탁한 공기가 입과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우리는 많은 돈이 없었다. 꼭 필요한 물건만 샀다. 오렌지주스, 제주도 귤 한 봉지, 구이용 고등어, 우유, 만두와 소시지. 쌀은 20킬로그램을 샀다가 10킬로그램으로 바꾸었다.
“나중에 쌀은 더 사기로 해요.”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며 그들의 쇼핑카에 담긴 물건들을 보았다. 누군가가 사주기를 바라는 물건들도 보았다.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들은 물건을 사기 위해 직장생활을 해서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이들은 이런 곳에서 만나 이야기한다. 누구는 어떤 집에서, 어떤 가구에, 어떤 음식을 먹고, 자식에게 어떤 옷과 가방을 사준다고 하네. 누구는 부자일까 가난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