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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차 앞 유리에 성에가 끼었지만 닦지 않고 그대로 출발했다. 가로등이 있는 곳이나 맞은편에서 차가 올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버려두었다.
‘엔진온도가 좀 높아지면 창문 쪽으로 히터를 틀지 뭐.’
이런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사거리를 통과하기 직전 행인이 도로를 횡단하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덜컥 겁이 나 브레이크를 밟았다.
당번 은행 앞에는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당번 직원이 내게 자판기 커피를 한 잔 건네준 후 사라졌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그러지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났을 때 내 모습이 붕 떠오르는 환영을 보았다. 내가 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기분은 묘하다. 이상하고 두렵기도 하다. 오래 전 이런 나를 몇 번이나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방을 든 직원이 문을 열고 옆자리에 앉았다.
“따뜻해요.”
무릎 위에 여성용 숄을 덮으며 당번 직원이 말했다. 내가 미소를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총각이었지만 계약직이었다. 내년 시험에 통과해야만 애인과 결혼도 하고 전세자금 대출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어제 2시까지 회식을 했더니 너무 졸리네요.”
얼굴이 뽀얀 총각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 입고 있는 하얀 털이 달린 외투도 그렇다. 그는 의자를 눕히고 잠이 들었다. 그는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할 성격은 아니라고 본인 입으로 말했었다. 그가 정규직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게 꼭 행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을 이루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막상 그것을 얻게 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달리는 동안 캐럴송이 흘러나왔다. 흰 눈 사이로 달리는 산타. 산타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할까.
어떤 사람이 예닐곱 살에 산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 남자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사실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 어릴 적 이야기니까 그렇다. 그가 본 산타는 우리가 아는 산타와 달랐다. 빨간 모자와 털옷이 없었다. 선물 주머니도 없었다. 실망스러웠다. 가슴에 산타할아버지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산타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고 계세요?”
그 말에 속옷만 입은 산타는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럴까. 그는 한참이나 산타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산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은 하늘나라로 데려다 줄 사슴이 없어서 이러고 있단다.”
“사슴이 도망갔어요?”
“아니야. 사람들이 빼앗아 갔단다. 나는 선물을 주러왔는데.”
“나쁜 사람들이네요. 돌려달라고 해보지 그러셨어요?”
“달라고 애원 했는데 들은 체도 않더구나.”
“그럼 어쩌지요? 음, 제가 찾아드릴 수도 없고. 참, 산타 할아버지는 부자잖아요. 사슴들도 많이 있을 테고요. 애들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줄 수 있고요.”
“그래 맞아. 하지만 하늘나라에도 사슴이나 선물이 많은 것은 아니란다. 그해 선물은 아이들 수만큼 만드는 거야. 내가 사슴을 타고 달리다가 내린 곳은 빌딩과 아파트 숲이 있는 거리였어. 사슴들이 그곳에 가면 아이들이 많다고 말했거든. 시골에 가면 아이들을 보기 힘들다고 했을 거야. 우리는 거리에 내렸는데 사슴이 끄는 썰매가 땅에 닿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사슴을 잠시 하늘에 가 있다가 오라고 하지 그러셨어요?”
“그럴 시간이 없었어. 사람들은 내가 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와하고 달려들더니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가져가 버렸어. 사슴하고 썰매까지 가져가 버렸어. 결국 나는 빈 자루를 메고 속옷 차림으로 거리에 서 있게 되었어. 선물은 모두 사라지고, 사슴이 없으니 하늘로 올라갈 수도 없고, 망연히 지상의 눈을 보고 있었어. 그때 노숙자 차림의 아이가 다가와 아는 체를 했어. 너도 지상에 와서 참 고생이 많구나. 나는 활짝 웃으며 녀석을 안아 주었어. 아이는 한참을 안겨 있었어. 그런 다음 나는 잊은 것이 있다는 표정으로 자루에 손을 넣어 선물을 꺼내주려 했어. 그 아이를 기쁘게 해 줄 선물을 귀신처럼 맞추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손을 넣기 무섭게 나는 깨달았어. 아무 것도 줄 게 없다는 것을 말이야. 부끄러운 내 손을 보았어. 나는 더 이상 산타라고 할 수 없었지.
그런데 그때 아이가 배시시 웃는 게 아니겠어? 처음에는 나를 비웃는 줄 알았어.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어느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한 해맑은 웃음이었어. 무슨 일일까. 궁금해졌어. 내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는데. 고마워요. 산타할아버지! 그 아이가 그러는 거야. 선물도 없는데? 내 말에 그 아이가 그랬어. 저를 안아 주셨잖아요. 사람들은 가난한 저를 안아 주지 않아요. 이 말에 나는 눈물이 글썽거렸어. 그러면서 웃음이 나왔어. 내가 무안할까 봐 혹시 웃은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웃음. 나는 자루 안에 아이의 것과 내 웃음을 넣어두고 싶어졌어. 다음 해 선물을 줄 때 무한히 불어난 이것들을 묻혀서 주고 싶어졌어.”
산타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 사이 산타는 어느 급하게 내려 온 사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어. 그것이 마지막이었어. 그 아이는 어른이 될 때까지 산타를 만나지 못했어.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만나지 못했어. 그 아이는 주위 사람들에게 산타를 만났다고 자랑했지만 누구도 믿어 주지 않았어. 다음에 선물 줄 때는 웃음을 묻혀 준대. 그래도 소용이 없었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헐벗은 산타라니, 누가 믿겠어? 선물 보따리가 있어야 산타라고 할 수 있잖아.
그때 뒤따르던 하얀 승용차가 위아래로 라이트를 번쩍거렸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긴급 상황인가. 여기는 사고가 자주 나는 구간인데. 라이트가 다시 반짝였다. 빨리 못 가면 비키라는 신호였다. 화가 난 나는 브레이크에 살짝 발을 올렸다가 뗐다.
“빌어먹을 자식, 멋진 상상을 깨뜨리다니. 불을 번쩍거려?”
몇 백 미터 갔을까. 하얀 승용차가 우측 차선을 거쳐 앞으로 끼어들더니 비상깜박이를 켰다.
‘한바탕 하자는 거로군. 난 싸우고 싶지 않은데.’
이런 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2차로로 방향을 돌렸지만 승용차는 2차로로 따라왔다. 내가 1차로로 다시 틀자, 1차로로 들어왔다. 하는 수 없었다. 나는 비상등을 켜고 자리에 멈췄다. 곧 앞차 문이 열렸다. 30대 초반의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무어라고 지껄이겠지.’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유리문을 내렸다.
“사고 날 뻔 했잖아.”
“그럼 왜 불을 번쩍거리는 거야.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고?”
그는 내 멱살을 쥐려했지만 내가 몸을 뒤로 뺐기 때문에 잡히지는 않았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직원이 눈을 떴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 경과를 이야기해 주었다.
“112 전화해요. 어서!”
직원의 말에 남자는 소리를 높였다.
“스티커 하나 끊기지 뭐.”
“뒤에 차 밀린 것 좀 봐요.”
직원이 뒤를 보며 말하자, 남자는 그들을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런 후 몸을 돌려 나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나도 지지 않고 그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늦을 수도 있겠다 싶어 유리문을 올렸다. 그런데 유리문을 잡으려던 그의 손이 문에 끼었다. 그가 다급히 외쳤다.
“어서 유리문을 내려. 내리란 말이야.”
서둘러 스위치를 눌렀는데 그가 비명을 질렀다. 유리문을 더 올린 모양이었다. 황급히 유리문을 내렸다. 미처 유리를 정지할 틈도 없이 그에게 멱살을 잡혔다.
“씨발놈이 죽고 싶나.”
그의 욕지거리에 나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누구는 욕 못하는 줄 알아?”
나는 손으로 바짝 다가든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뒤편으로 차들의 행렬이 보였다. 아마 10미터는 아니 100미터는 밀려있었다. 잠시 후 이성을 찾은 남자가 말없이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도 더 이상은 이 상황을 견딜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잘 참았어요.”
직원이 말했지만 나는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 탓도 있었지만 그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내 상상을 깨뜨린 것이 화가 났을 따름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