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없는 도둑 20

by 양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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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내와 아이들 모두 목욕탕에 간 듯하다. 혼자 커피에 빵 부스러기를 먹고 보일러를 켠다. 자리에 누워 무당이 귀신을 부르듯 텔레비전을 보며 잠을 부른다. 잠은 나를 쉬게 해 줄 것이며 꿈도 꾸게 해 줄 것이다. 지구가 도는 것처럼 안구 운동도 할 것이다. 어쩌면 허상에서 벗어나 진실로 가는 길을 알려줄 것이다.


눈을 떠보니 아이들과 아내가 집에 와 있다.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태어나고 싶어?”

저녁을 먹은 후 아내가 무심코 말을 던진다. 그 말에 나는 더없이 진지해진다. 이런 때 유머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약점인가. 그것을 나는 한참 후에야 깨닫는다.

“이 세상은 고해야. 이런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이 말에 아내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좋은 부모 아래 태어나고 싶어. 따뜻하고 애정 있는 부모한테 태어나고 싶어.”

그건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장인어른은 인자하고 부드럽잖아.”

“그렇지만 어린애 같아.”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내가 문득 전생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든다. 원시적인 몽롱함 속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나는 고통을 피해 치유할 수 없는 병을 향해 쉬지 않고 헤엄치고 있다. 그 어디엔가 있을 안락과 편안함을 찾아. 바위 아래, 동굴 속 어느 곳인가. 그러다 보니 계통발생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하다. 바닷속 정령들이 헤엄쳐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금방 사라진다. 노란 해마가 다가온다. 처음 보는 해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묻지만 대답이 없다. 어쩌면 나에게 좋은 일을 알려주려고 온 걸까.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해마는 빙긋이 친한 웃음을 짓는다. 나를 빙 둘러보고 한 바퀴 돈 후 천천히 제 갈 길을 간다.


다음 날 아침이다. 나는 큰아이가 학교 가야할 때까지 잠 속에 빠져있다. 그러다가 아이가 아침을 먹을 무렵 화장실로 들어간다. 추운 날씨다. 몇 분 변기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시베리아의 한기가 느껴진다. 아파트에 살았더라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큰아이도 학교에 가기 싫어 뭉그적거리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일어선다.

“정말 겨울은 싫어. 추워서 싫어.”


아내의 말에 나도 고개를 주억거린다. 겨울은 죽음과 가까운 계절이다. 혹독한 시련 속에 생명체를 몰아넣는다. 내가 고향을 떠나 남쪽 마을에 거처를 정한 것도 해발 육백 미터 고원의 겨울이 싫어서이다. 수시로 눈이 발목까지 쌓이고, 문고리는 잡기만 해도 달라붙었다.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 준 후 돌아와 다시 눕는다. 아내는 이발을 다녀오고 목욕탕도 갔다 오라고 성화다. 귀찮다. 모든 것이 귀찮아진다. 이 세상에서 살려면 끊임없이 해야 하는 정상에 바위 밀어올리기. 부수고 다시 쌓고 부수고 다시 쌓고. 인간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고릴라는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아도 살지 찌지 않지만 인간은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 비만이 된다. 그렇든가 말든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다. 난 원래가 게으른 인간이다. 우리 부모님이 무수히 내게 말했듯 나는 게으르고 또 게으른 인간이다. 잠이 많고 또 많은 인간이다. 잠이 많아서 망할 거라고 어머니는 늘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상하다지만, 나는 눕자마자 금방 잠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몽롱함 속에 느껴지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그 어딘가에 나는 지금 있을 것이다. 거기는 윤곽이 불분명한 흐물흐물해진 액체의 세계다. 거기는 늘 안락한 기분이 든다. 부단히 애써서 살아간들 세상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조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겨우 밥 먹기 위해 버둥거리다 목숨을 놓을 뿐이다. 거기에 신의 큰 뜻도, 오행이나 음양의 조화도 없다. 우리는 부질없이 계통발생을 되풀이 하여 세상에 왔다가 우주의 먼지가 되어 흔적 없이 사라질 뿐이다.


아내가 어젯밤 꿈 이야기를 한다.

“7층 명희네 집. 그러니까 아파트 고층인데. 명희네가 이사를 간다고 하는 거야.”

명희는 아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 이름이다.

“누런 장판. 때가 끼어 누리끼리한 장판이 보였어. 그 다음에 화장실에 갔어. 볼일을 보고 있는데 수챗구멍에서 붉은 아니 누런 구렁이가 고개를 쑥 내밀고 올라오는 거야. 와락 겁이 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도 못 타고 계단으로 뛰어내려왔어.”


더 이상 아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듣고 싶지 않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쇠락의 징조이다. 운이 하강하는 것이 분명하다. 정말 좋은 꿈이 아니야. 그렇지만 커다란 구렁이의 상징은 알 수 없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불행과 고통, 아니면 행운이나 성공. 몰라, 모르겠어, 몰라. 나는 지금껏 살면서 잘된 적이 없기 때문에 미래가 잘 될 것이라는 생각에 쉽사리 숟가락을 올릴 수 없다.


다시 눈을 뜨자 아내는 갓 지은 밥과 시래기 된장국을 담은 상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온다.

“끼니때마다 챙겨 먹으려니 고생이야. 그래도 지금까지 난 많은 일을 했지?”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지 말하는 중이다. 나는 아내가 밥상을 차려오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 일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먹고 있다. 그래서 내 삶을 요리하는 것에서 배우지 못한 걸까. 먹고 싶은 것, 좋아하는 재료나 양념, 뒤집는 방법이 아내와 달라질 수 있는데. 나는 삶의 즐거움 하나를 잃었다.

“오후에는 이발하고 목욕도 좀 해.”


두 번째 하는 말이다. 나는, 남자들이란 요렇게 생겨먹었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에게 변명일 따름이다.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내게 해롭고. 우리가 결혼한 것은 서로의 말을 잘 듣겠다는 약속이지 않은가. 부부나 애인이 마음을 상하게 되거나 다투게 되는 것은 커다란 일 때문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일 때문이다. 이것은 아내로부터 배운 것이다. 아내는 내게 몇 차례 꼭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말한다. 언제 그것을 잊을지 모르지만.


점심을 먹은 후, 아이들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텔레비전을 켜놓고, 컴퓨터를 켜고, 실로폰을 두드리고, 리코더를 불고, 누구도 제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벌어진 이 행동들이 좀 더 넓은 공간에서는 커다란 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거실이나 작은방이 모두 추워 안방에서 오글오글 사는 주택이라면 커다란 고통이 된다. 이것도 아내의 말이다. 내 말이 아니라. 나는 그녀가 한 말 속에서 살고 있다. 물론 그녀도 내 말 속에 살고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서로가 했던 말을 떠올릴 것이다. 이것이 서로에게 적응하는 과정이다. 이 순간 내가 만약 아이들을 데리고 나섰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리코더를 집어던지고 고함치는 아내를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누가 이 장면을 보면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여자와 살고 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이들이 떠든 것은 아마도 무의식적인 것 같았다. 그럴 만해서라고 말하면 될까. 아이들은 엄마의 화가 극도로 오른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터트릴 기회를 장만해 준 것이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전혀 그 반대가 아니다.


“겨우 참고 살고 있는데 이놈들이!”

나는 뒤늦게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거리에 나서자 속이 툭 틔었다. 나는 아이들과 즐겁게 미장원으로 걸어갔다. 그런 후 병원을 거쳐 거리를 떠돌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이리 늦는 거야?”

“혼자서 조용한 시간 보내라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내의 애처롭게 웃는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아이들을 집으로 들여보내고 목욕탕으로 향한다. 설마 아이들에게 또 화내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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