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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실에 있는 3대의 인식기는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용지 하나가 지나갈 때마다 화면에 흔적을 남겼다. 파트타이머 아줌마 중 누군가가 틀어놓은 카세트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엔 선물을 안 주신대요.’
그렇다. 누구도 울며 징징거리는 꼴은 보기 싫은 것이다. 처음에는 애처롭게 보여도 곧 지겨워진다. 더더욱 그것이 나이든 어른이라면 그렇다. 연체해서 살기 힘들어 죽고 싶다고 징징거려본들 거대 신문에서는 그것을 기사로 내보내지 않는다. 누군가 경제난으로 죽었을 때만 잠시 귀를 기울이는 체한다. 언제부터였을까. 거지를 동정하지 말라고 한 게. 아마도 이 나라에 진화론이 들어오고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성행하기 시작한 때가 아닐까. 약한 동물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라고. 약한 자는 징징거리지 말지어다. 이것이 제국주의 논리임을 구한말 개화파들은 알았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물질에 반해 보이지 않는 것의 고귀함을 설파할 논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친일의 길을 걸어 일본의 지배에 순응하였을 것이다.
“아이들한테 줄 선물 준비했어요?”
가장 오래된 파트타이머 아줌마가 내게 물었다. 나는 말 대신 슬며시 웃었다.
“여자아이들한테는 인형이 좋아요.”
다른 아줌마가 잠시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인형은 좀 비싸지 않나. 우리는 케이크 하나 사다가 촛불 켜 놓고 소원 비는데.”
또 다른 아줌마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나는 가위를 놓고 일어났다.
“좋은 생각입니다.”
앞으로 한두 시간 후면 일은 끝날 것이다. 나는 창가로 갔다. 멀리 빨간 십자가 아래 늘어진 전등이 보이고 그 앞으로 쇼윈도 안이나 밖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운 가게들이 보인다. 하늘의 산타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사람들이 기다리는 줄 안다면 꼭 그날이 올 때까지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을 것이다. 건너편 백화점 앞에는 모자에 빨간 띠를 두른 구세군 사관들이 종을 흔들고 있다.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캐롤은 바뀌어 있다.
‘라 쿠카라차.’
나는 캐럴송에서 설렘을 느낄 수 없다. 단지 명랑하고 환한 목소리의 아이가 떠오를 뿐이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벅찬 느낌과 간절히 복을 비는 사람에게 내려줄 축복에 대한 기다림은 없다. 짓눌리고 우울한 기분 때문일까. 나는 크리스마스를 몇 개의 색채와 느낌으로 나누어 분석을 시도해 본다. 우선 하얀색의 밝음일 것이다. 환한 등불이나 하얀 눈이 주는 밝은 하얀색이다. 다음은 빨간색의 따스함이나 포근함이다. 구세군의 빨간 냄비가 그렇고 목소리나 외투, 산타의 복장이다. 그다음은 녹색일까, 검은색일까. 종소리의 거룩함, 크리스마스 캐럴과 트리. 이 부분에서 나는 멈춘다. 이것은 과연 어떤 색일까 싶다. 어쩌면 거룩이 난무하는 곳에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눈을 감았다가 뜬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 전시효과나 무대장치, 아니면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다. 거룩함도 그럴까. 우리 영혼이 그런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는 색채와 무관한 것이 아닌가.
그때 카드사의 전화가 울린다. 그녀는 발신자 제한 표시로 전화를 하고는 내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버럭 화를 낸다. 그녀는 말일 전에 결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아하 그렇구나. 아하 그렇구나 죽거나 말거나.”
얼굴도 모르는 삼십 대의 여자가 크리스마스이브에 한없이 미워진다. 그녀를 죽이고 싶어진다. 칼로 마라를 찔렀던 여자처럼. 아니야. 이 여자는 당사자가 아니야 하수인일 뿐이야. 아니 양 아흔 아홉 마리 중 하나인 대리인. 이성을 찾으려고 잠시 시도했다가 포기한다. 분노가 장마 지난 풀처럼 쑥쑥 커 오른다. 아마 카드사의 메인 컴퓨터를 파괴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야. 하지만 어떻게? 연체자들과 힘을 모아서. 조선시대에 먹고 살기 힘든 농민들은 산적이 되었지만 임금은 그들을 이해했다. 잡혀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백성이 이렇게 되었음을 자책했다.
그때 집에서 전화가 왔다. 흥분된 아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다. 그것이 내게 견딜 수 없는 공감을 낳을 것이다. 주인 여자가 우리 몰래 집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우리 이러다가 길거리에 나앉으면 어쩌지?”
아내의 말에 아직 공감을 느끼지 못한 나는 남의 일처럼 말했다.
“정말 큰일이네. 아직 전세계약서도 못 받았는데.”
불안한 이 집. 1억이 넘게 근저당 설정되어 있는 집에. 주인이 아래층 여자에게 집을 팔겠다고 해서 잠시 계약을 미루었다.
“일단 주인여자와 통화를 해보고 연락을 해줄게.”
장표가 담긴 박스 속에서 재스캔 할 장표를 찾는 동안 머리에 열이 올라 뜨거워졌다. 아내의 목소리가 내 속에서 메아리치며 처절한 공감에 이른다. 거리에 나앉는다는 말이 주는 비참함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울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보이는 듯하다.
아내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은 오래달리기를 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 연옥과 지옥 사이를 오간다. 사천왕의 발에 짓밟혀 버둥거리는 내 모습을 본다. 언제 카드사에서 차압이 들어올 줄 모르는 판에 전세계약서가 없으니 어쩌면 잘된 일인가. 카드사에서 가압류 한다면 전세계약서라고 남겨 줄까봐. 그건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 아래층 여자에게 전세금을 날릴 판이었다. 에이 될 대로 되라. 죽으면 죽으리라. 한순간 체념했다. 나는 끝도 없는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바닥이 있다면 다시 튀어오를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바닥이 없다면 나는 영원히 떨어지는 형벌에 처해진 것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일들이 하나씩 밀려온다. 그러고 있을 때 아내의 전화가 온다. 시계를 본다. 그 사이 1시간 30분이 흘렀나 보다.
“아래층 여자와 통화했는데 괜찮을 것 같대.”
나는 다시 창으로 다가가 불빛이 환히 비치는 도시를 보았다. 저기 저 휘황한 불빛을 떼어 조금만 내게 준다면 얼마나 삶이 환해질 것인가. 아니 그 곁에 내내 서 있는 것이라도 허락해 준다면 얼마나 따뜻할까. 카세트에서는 여전히 캐럴송이 나오고 있다.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예수님처럼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내버려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한 마리 부자 양을 위해 가난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버릴 것이다.
퇴근길에 동양마트에 들러 생크림 케이크를 하나 샀다. 작은아이가 좋아하는 키위가 얹힌 것으로.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며칠 전에 돼지저금통을 털었어. 제발 케이크는 사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