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괜찮다는 말이 제일 아팠다. _ by. 봄볕
어릴 적엔 불 꺼진 방,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소리,
베란다 창문에 어른거리는 나뭇잎 그림자 하나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머리를 감다 말고, 혹시나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거품을 걷어내며 억지로 눈을 뜨곤 했다.
무언가 나를 덮칠까 봐,
방 안의 불도 끄지 못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였던 밤들이 있었다.
그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가장 두려웠다.
어릴 적에는 친구들과 함께 분신사바를 하며
금방이라도 어둠 속에서 튀어나올 귀신의 형체를 상상했다.
그 공포에 소스라치면서도
동시에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호기심을 매번 공유하며 놀이처럼 즐겼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던 어느 날,
큰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는 뭐가 제일 무서워?"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귀신이 무섭지 않은 나이가 되어 있었다는 걸.
귀신에 대한 공포도, 호기심도
이미 내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는 걸.
나는 아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엄마는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아이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사람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갑작스러운 이별과 배신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장 믿었던 사람이
어느 날 내 뒷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았을 때.
아무리 잘해주고 다 내어줘도 등을 돌리는 사람들.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 채 미움을 감당해야 했던 순간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어른이 되어 마주한 또 하나의 공포는 죽음과 부재였다.
사랑하던 사람의 빈자리.
그 얼굴도, 목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나는 깊은 심연에 가라앉은 조개처럼
매일같이 상처를 감싸 안으며 그 안에 조용히 진주 하나를 품어야 했다.
상실의 고통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 '익숙함'이라는 얇은 막이 하나 더해질 뿐이었다.
유리창 너머의 세상은 미울 만큼 아름다웠다.
햇빛은 찬란했고, 꽃은 피고,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웃었다.
하지만 그 풍경 속에 그 사람만 없는 현실은 낯설고 아득하기만 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단 하나,
그 사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세상 전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느 날은 아무 맥락 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슬픔마저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이 더 무서웠다.
어릴 땐, 어른이 되면 무서운 게 없는 줄 알았다.
조금은 더 단단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어른이라는 건,
몸만 덩그러니 커버린 아이에 가까웠다.
겁은 더 많아지고,
눈치는 더 빨라지고,
말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무서움의 결은 더 복잡해지고, 깊어졌다.
어른의 공포는 순간의 놀람이 아니라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설명되지 않는 무게였다.
언제든 내 곁의 소중한 것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무게.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것들을
그저 견뎌야 한다는 무력감의 무게.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 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깊은 공포로 다가왔다.
애써 쿨한 척,
무섭다는 말을 목구멍에 걸린 가래처럼 삼켜두고,
"어른이라니까."
"어른이면 그래야 한다니까."
모든 걸 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람이 무서워지고,
이별이 두려워지고,
내일 닥칠 알 수 없는 시련 앞에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내는 마음들.
그렇게 어른들의 세상은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흘러간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가 끝내 잊지 말아야 할 단 한 가지.
익숙함에 속아
곁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언젠가 이별할 것을 알기에,
'나중에'가 아닌, '오늘' 더 따뜻하게 바라보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사람이 곧 삶이고,
삶이 어느새 전부가 되어버린 당신에게.
진짜 어른이 되고 싶은 당신에게.
도자기를 빚듯
하루하루 마음을 매만지며,
뜨거운 가마의 열기를 견디고 있을 당신.
무서움을 안고도 살아내는 법을 배우며,
조금씩,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을 당신.
아무래도 괜찮다.
무서울 땐 무서운 대로, 그 감정에 버무려져도 좋다.
매운 아픔이 시간과 함께 익어 더 깊고 단단한 맛을 내듯,
지금의 그 마음도 언젠가는 당신만의 단단한 위로가 되어줄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할 것.
이미
당신은 충분히 잘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