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누군가의 덕분

by 봄볕



한동안,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의 학습을 챙기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첫째의 수학 기초가 부족하니 외부에서라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전달이었다.

부랴부랴 학원을 알아보고 보냈지만,

성적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여러 선생님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아이가 너무 느리고, 이해를 잘 못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음 한구석이 죄를 지은 듯 공허했다.

하지만 곧 스스로를 다독였다.

모든 아이가 수학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재능은 저마다 다른 결로 피어나고,

첫째는 그저 다른 방식으로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나도 수학과는 친하지 않았다.

기초도 없이 학원만 전전하던 중학교 시절,

한 번은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해보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학교 수학 선생님이 차갑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무섭게 쳐다봐? 그럴 거면 엎드려 잠이나 자."

그 말은 내 의욕을 단숨에 꺾어버렸다.

후로 수학은 내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나는 점점 수학에서 멀어졌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수학이 전공인 담임 선생님과 자주 부딪혔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마지막까지 남아 칠판을 지우고 있던 내게 선생님이 말했다.

"너 나 싫지? 나도 너 싫어."

너무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 날 이후, 선생님도 나 자신도 이유없이 미워졌다.

마음이 무너진 채 전국모의고사 시험지를 받아들던 날,

나는 복수심에 수학 문제를 1번으로 모두 찍고 책상에 엎드렸다.

그렇게 나는 수포자가 되었다.


반면, 나는 국어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4학년, 처음 백일장에서 상을 받은 이후

글쓰기는 내게 더없이 즐거운 일이 되었다.

글을 쓸 때마다 칭찬이 따라왔고,

그 말들이 나를 더 열심히 움직이게 했다.

미술과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인정해주는 선생님들에게 더 잘 보이고 싶어서,

모르는 기술도 기꺼이 배워가며 최선을 다했다.


그 시절을 지나며 나는 알게 되었다.

무심코 던진 차가운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는 걸.

날카롭게 스친 눈빛 하나가

어린 마음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던 나의 예전처럼...


며칠 전, 첫째의 수학 문제로 고민이 깊어지던 날.

2년째 아이를 가르치고 있는 영어 학원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처음엔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했어요. 그런데 이 아이는, 선생님의 시선이 어떠냐에 따라 전혀 다른 아이가 되더라고요. 게다가 머리가 정말 좋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다른 친구들보다도 훨씬 빠르게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알아요. 이 아이는 선생님이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어요. 분명한 건, 천재성을 지닌 아이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래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이 아이의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고 기다려준 선생님.

얘는 왜 이래? 가 아니라

얘는 어떤 아이일까? 라고 물어봐준 선생님.

할 수 있다고 믿어주고,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끝까지 손을 놓지 않은 선생님,

이 아이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품을지를 먼저 고민해준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건 아이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은 결국, 사람을 통해 자란다.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 하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전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


그 시선은 꽃 길이 되기도 하고, 낭떠러지가 되기도 한다.

어떤 시선에 놓이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고,

누군가는 자신을 포기하는 삶을 선택한다.


그래서 우리는

따뜻한 말을 항상 곁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말을 내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넌 안돼."

"넌 실패자야."

"너 같은 얘가 뭘 하겠어?"

그런 말을 곁에 두면,

결국 스스로도 그렇게 믿게 된다.

그 믿음은 천천히 한 사람을 무너뜨린다.

가능성을 막고, 마음을 닫게 하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할 수 있어."

"천천히 해도 괜찮아."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그런 말을 곁에 둔 사람은 다르다.

마음이 자라고, 자신을 믿게 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당당히 찾아간다.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지.


사람을 바꾸는 건 결국,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기억하자.

끝까지 믿어주는 시선 하나가,

결국 한 사람의 삶을 바꿔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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