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마음이 괜찮은 거절.

by 봄볕



나는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

속으로는 몇 번이고 "안 될 것 같아." 라는 말을 떠올리면서도

그 한마디를 끝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하루를, 때로는 며칠을 전전긍긍 앓는다.


며칠 전, 한동안 연락이 없던 J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럭저럭 알고 지내던 사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오랜만에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그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영업직을 시작했다며,

내가 하나만 사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당황스러웠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매일 안부를 나누는 가까운 친구도 아니었다.


속으론 수십 번

"미안해, 지금은 힘들어."를 되뇌었지만

그 말을 꺼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를 돕지 못하겠다는 미안함과

거절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겹쳐

부담이 가슴을 짓눌렀다.


'연락 없던 사람이 갑자기 연락이 오면

십중팔구 뭔가를 부탁하더라.'

예전에 S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그런 상황을 겪고 있구나.'

J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썼다.

오죽하면 나에게까지 연락했을까 싶어 안타깝기도 했다.

가장의 무게, 생계의 무게.

그 치사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전전긍긍했을지 알기에,

외면하려는 내 자신이 왠지 더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결국 하루를 꼬박 고민하고나서야

짧은 문자를 보냈다.

"미안해. 지금은 어렵겠다."

그리고 한참을 죄책감에 시달렸다.

미안함에 얼굴이 붉어졌고,

생각이 쉽게 떠나지 않아 한동안 어쩔 줄 몰라 했다.


누군가에게 거절을 말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그 말을 꺼내서 혹시 상처받으면 어쩌지?'

내 감정보다 늘 상대의 감정을 먼저 살폈다.

'설마 그런 뜻이었겠어.'

'나를 아프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면

정작 내 마음은 점점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참고 또 참다 보면

어느 순간, 조용히 무너지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나 지금 좀 불편했어."

"그 부탁은 조금 무거웠어."

그 단순한 말들이

누군가에겐 상처로 전달될까봐

나는 늘 괜찮은 척을 해왔던 것 같다.


사실은,

내가 가장 괜찮지 않았는데도.

괜찮다고 말해왔던 날들이 쌓여

결국 나 자신을 향한 미안함으로 쏟아졌다.


나는

나를 아끼는 방식을 몰랐다.

내 마음을 무시하지 않는 연습,

나의 감정을 미뤄두지 않는 연습.

연습장에 끄적이 듯 써 내려간 감정들이

결국 내 마음 깊숙이 박혀 더 나를 괴롭혔다.


그날, 용기를 내어 보낸

단 한줄의 "미안해."


그 뒤에 붙지 못한 J의 말들을

나는 조용히 상상했다.

이기적이라는 말,

"이 까짓 거 하나 못도와주냐"는 말.

그럴 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조금 이기적으로 살기로 했다.


이번 일을 겪으며 다시금 알게 됐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얼마나 그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때론 둘 사이에 조심스러운 균열을 남길 수 있는지를.


나는 다짐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기대야 할 순간이 온다면,

그 마음을 너무 쉽게 건네지 않겠다고.

'부탁'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의 마음을 짓누르지 않겠다고.

그 사람의 마음부터 먼저 살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리고,

내 마음 또한 그렇게 소중하게 다뤄지기를 바란다.

아무렇지 않게 짓밟히지 않기를,

말 한마디에 무너지지 않기를.


조금은 조심스럽게,

조금은 더 깊이 들여다보며,

그렇게 서로가

아픔 없이 닿을 수 있기를.


그게,

내가 나를 지키는 첫 번째 배려이자

놓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예의라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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