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책이 건네준 다정한 온기.

힐링에세이

by 봄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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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친구들이 만화책을 돌려보던 때에 나는 혼자 시집을 읽었다.

수업 시간에도 문득 떠오른 시상을 놓치기 싫어

교과서 대신 공책에 시를 적었고,

그런 날이면 수업 내용은 늘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한 번은 그런 이유로 엄마가 학교에 불려 간 적이 있었다.

그날 엄마는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가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아서 그래요. 그냥 두세요."

그 한마디는 내게 큰 안도감을 안겼다.

내가 좋아하는 걸 믿어준 사람,

그 믿음 하나가 내 안에 오래 남아

결국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이끌었다.


어릴 적, 화장실에서도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책장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밤에는 공책을 펼쳐 놓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 시간이 내겐 가장 빛나는 놀이였다.

아빠는 그런 나를 위해

기왓장을 구해다 시를 전시해 주었고,

가을이면 플라타너스 낙엽을 주워다 건넸다.

군인이었던 작은아버지는

내 시를 낭송하며 매번 진심 어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오빠는 내 생일마다

반짝이는 포장지에 곱게 싸인 시집을 선물해 주었다.

글을 향한 나의 깊은 사랑은

그 조용한 지지들 속에서

조금씩, 그러나 단단하게 자라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책을 읽는 일 또한 좋아하게 되었다.

책은 더 이상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숨이었고,

삶의 중심을 지켜주는 빛이었다.

히지만 성인이 된 후,

사회생활과 육아에 치이면서 나는 점점 책과 멀어졌다.

늘 시간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긴 공백은 생각보다 더 깊은 공허를 데려왔다.

결국, 그 공허는 나를 정신과 문 앞까지 데려다 놓았다.

기필코 무너질 것만 같았던 어느 날,

나는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루는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는 책이 그렇게 재밌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재밌기도 하지만, 책은 엄마를 계속 성장하게 해."


아주 미약하고,

이기적이고,

늘 부족한 나를

책은

스스로 돌아보게 했고,

덜 비난하고,

더 성찰하게 만들었다.


"책으로 배웠어요."

한 때, 책으로만 배운 사람들은

세상을 잘 모른다는 말처럼 쓰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말 제대로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제대로 쓰인 책의 문장이 얼마나 깊고 따뜻한지,

삶을 어떻게 비추는지 알 것이다.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진심을 다해 써 내려간 문장은 결국, 진심으로 우리에게 닿는다.


귀하게 번 돈으로 책을 사고,

그 책 위에 밑줄을 긋고,

작가와 내가 하나가 되는 그 순간,


'맞아, 나도 그랬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문장을 만날 때면,

나는 바꿀 수 없는 행복을 안고

한 뼘 더 자라난 나를 마주하게 된다.


아직도 부족하고,

여전히 완만하지 않은 나지만,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마음들이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런 책들을 곁에 두고 살아가다 보면

결이 비슷한 사람들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내 삶 안으로 스며든다는 것이다.


좋은 문장에 고개를 끄덕일수록 좋은 사람들이 곁에 머문다.

어쩌면, 그 문장에 물들어 내 가치관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내 삶은 조금 더 넓어지고, 조금 더 따뜻해지고, 조금 더 깊어진다.


책이 나의 내면을 채웠고, 사람들이 그 빈 곳을 함께 들여다봐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고, 쓰고 싶다.

짧은 틈을 쪼개서라도 해내고 싶다.


책은 내 삶의 중심을 지켜주는 등불이고,

글은 내가 나로서 살아 있게 만드는 숨이니까.


마음이 힘들고,

삶이 불안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겠거든,

당신도 나처럼 책을 통해 숨을 쉬는 경험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마음이 주저앉을 때,

당신도 모르게 삼켜온 말들을

책이 먼저 꺼내어,

다정히 당신에게 건넬 것이다.


그리고 그 문장을 의심 없이 따라가다 보면,

책은 결국

당신을 당신에게 데려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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