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에세이
하루는 Y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 A 생일을 챙겨줬는데, 내 생일엔 아무 말이 없더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걸 바라면서까지 굳이 챙길 이유가 있었을까.'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믿는다.
내가 건넨 마음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절반만큼은 돌아와야 관계가 균형을 이룬다고.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맞춰가다 보면
불쑥, 불편한 감정이 고개를 든다.
겉으로는 다정하게 보이는 사이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기대 안에서 위태로운 관계에 놓이고 만다.
누가 먼저 연락했는지,
누가 더 마음을 썼는지,
하나씩 속으로 셈하다 보면
관계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흔들거린다.
K에게 들은 이야기도 그랬다.
늘 먼저 연락하던 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작은 일에도 늘 반응해 주고,
생일이면 빠짐없이 챙겨주던 사람.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관계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뒤로는 혼자 애쓴 시간이 괜히 억울하게 느껴졌고,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씁쓸했다.
K는 기대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녀 마음 어딘가에는
아주 작고 조용한 기대 하나쯤은 숨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작은 기대들이 말없이 쌓이고 쌓이다가
젠가처럼 한 번에 무너졌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기대는
특별한 순간보다 사소한 일상에서 더 자주 얼굴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남편이 아플 땐 새벽에라도 약을 사러 뛰었던 나와 달리,
내가 아플 때 "좀 자면 괜찮아질걸?"이라는 말로 끝이 났을 때.
시어머니 생신에 꽃과 영양제를 정성껏 챙겼는데,
내 생일엔 "어제였니?"라는 말 한마디로 지나갔을 때.
친구의 결혼식엔 사회까지 맡았는데,
정작 내 결혼식엔 식순이 끝날 무렵 얼굴을 겨우 마주했을 때.
육아에 지쳐 숨이 턱 막히던 어느 날,
내게 음료 한 잔을 건네준 사람이
남편도, 시댁도, 친구도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렇게 사소한 장면들이 하나 둘 마음에 쌓이면,
'이 정도면 알아주겠지.' 싶었던 처음의 마음은
어느새 실망으로, 서운함으로,
끝내는 조용한 원망으로 바뀌어간다.
그리고 그 원망은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 계산이라는 꽃을 피우게 만든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너도 그만큼은 해야지."
기억하고, 비교하고, 따지고, 끝내는 마음을 저울 위에 올린다.
관계는 그때부터 따뜻함보다는 의무가 되고, 끝내는 서로를 지치게 만든다.
가령, 명절마다 시댁엔 빠짐없이 인사를 드리고,
선물과 용돈을 준비했다고 해보자.
그런데 정작 친정엔 "이번엔 그냥 전화로만 해."라는 말이 돌아온다면?
관계의 무게가 기울어 있음을 문득 깨닫는 순간, 당신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
무엇이든 내가 먼저 챙기고, 먼저 연락하고, 먼저 안부를 묻던 내가,
어느 날 그 모든 '먼저'에서 지쳐 진짜 나를 돌아보게 된다면?
그땐 묻게 될 것이다.
"내가 했던 마음은 정말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걸까?"
진짜 베풂이란,
상대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너한테 이만큼 했잖아."
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베풂이 아니라 거래다.
내가 생각하는 베풂은,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마음에 가깝다.
기저귀를 갈고, 밤새 안아주고, 새벽마다 울음을 달래면서도,
돌려받을 걸 계산하지 않는 그런 마음.
아이의 무탈한 하루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여기는 그런 마음 말이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타인에게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
기대 없이 베푸는 일은, 어른에겐 특히 어려운 일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또 한 번 실망하고도
여전히 착하고 다정한 사람인 척을 멈추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엔, 또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나는 어떤가.
당신도 지금 비슷한 마음이 들고 있진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야 한다.
정말 베풀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지길 바랐던 건 아닐까
진짜 좋은 사람이기보다는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었던 마음.
부정하고 싶겠지만,
그게 꽤 많은 관계의 시작이자 끝이다.
남의 시선, 그리고 나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두려워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며 지내온 시간들이 어쩌면 꽤 많았을지도 모른다.
진짜 베풂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거래하지 않는다.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억지로 마음을 재거나 애써 내어주지도 않는다.
관계란, 기대가 아니라 내리사랑처럼 흘러야 오래간다.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흘러간 마음만이 끝까지 따뜻하게 남는다.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
내가 내어준 마음이 거기까지였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마음이 아니라,
내가 나를 지켜내기 위한 단단한 마음이니까.
그리고 그런 마음은
언제 어디서든 다시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