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계획에 없던 '다행'이 왔다.

힐링에세이

by 봄볕


H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속도로 IC 입구에서 갑자기 핸들이 말을 듣지 않아 차를 멈췄고,

결국 렉카를 불러 수리를 맡겼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차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보다,

'그래도 IC 입구에서 멈춘 게 얼마나 다행인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고속도로 한복판이었다면, 정말 큰일이었을 테니까.

H를 다독이며, 나도 모르게 가슴 한 켠을 쓸어내렸다.


여행은 말만으로도 설레는 일이다.

그런데 IC입구에서 갑자기 차가 멈췄다면,

그 순간의 당황스러움은 얼마나 컸을까.

머릿속은 하얘졌을 테고, 마음도 꽤 조급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H는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차는 수리에 맡기고,

불편함을 감수한 채 렌터카를 빌려

예정대로 군산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선택이 단순히 여행을 이어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오늘 하루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였고,

삶의 궤도가 어긋날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하루의 방향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누구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갑작스레 놓일 때가 있다.

중요한 면접을 가는 길,

신호등마다 멈춰서는 바람에 마음이 조급해지거나,

갓 내린 커피를 바닥에 쏟는 일 하나로

하루 전체가 엉켜버리는 날도 있다.

약속에 나서려는 순간,

갑자기 쏟아진 비에 발걸음이 멈춰지기도 하고,

하필 중요한 날에

아이의 열이 올랐다는 전화를 받기도 한다.


계획이 어그러지는 순간,

가장 먼저 드러나는 감정은 대개 초조함과 짜증이다.

그 감정에 오래 머물다 보면

애초에 품었던 마음마저 흐려지기 쉽다.

짜증이 깊어질수록

하루 전체가 엉망이 된 것처럼 느껴지고,

우리는 결국 '괜히 하려 했어.'라는 말로 스스로를 지워버리게 된다.


하지만 상황을 그저 상황으로 두고,

더 안 좋은 일로 번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이라도 안도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도

다시 방향을 돌릴 힘이 생긴다.


불편한 상황은 바꿀 수 없어도,

그에 대응하는 나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그 사실이 우리를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렇게 돌아간 길은

늘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처음엔 계획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을지 몰라도,

그때가 아니면 마주하지 못했을 마음을

결국은 만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늘 이런 식이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때로는 화가 치밀지만,

돌아보면 별일 아니게 느껴지는 순간도 많다.


삶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방향이 바뀌었다고 해서

목적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우리가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면,

삶은 또 다른 방식으로 길을 내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엔,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더 단단하고

더 따뜻한 내가

서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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