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에세이
타인의 문제가 방송을 탈 때,
때론 우리는 너무 쉽게 관찰자이자 판사 같은 입장이 되곤 한다.
아동 심리를 공부하던 시절,
'금쪽같은 내 새끼'를 즐겨 보던 나 역시 그랬다.
얽힌 실타래처럼 어둡게 흔들리는 부모들의 눈빛을 보며
적당한 거리에서 동정의 한숨을 내쉬고,
화면 속 불행을 유리창 너머의 비바람처럼 구경하곤 했다.
그런 나의 오만한 시선이 산산조각 난 것은,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그 화면 속에
내가 가르치던 아이가 등장한 날이었다.
그곳에서의 아이는
타인의 감정을 읽지 못한 채 충동에 휘둘리며,
수업에도 전혀 마음을 두지 못하는 낯선 아이로 그려지고 있었다.
나는 속이 상해 끝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내가 아는 그 아이는 분명 달랐다.
수업 시간에 눈을 맞추며 귀엽게 웃을 줄 알았고,
애교 섞인 말투로 내 입에 간식을 쏙 넣어주며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하고 와락 안기던 다정한 아이였다.
물론 참을성이 바닥나는 날도 있었지만,
언제나 화면 속 모습처럼 막무가내인 아이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방송은 아이의 수많은 조각 중
가장 극단적인 단면만 떼어내어 보여주고 있었다.
편집의 가위질은 내가 알던 다정한 순간들을 무참히 잘라냈고,
아이를 단 하나의 문제로 압축시켰다.
방송을 보는 내내 묘한 불편함과 안타까움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TV 화면이 꺼지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문제'란 결국 누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얼굴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겉으로 드러난 찰나의 단편만으로
그 사람 전체를 너무 쉽게 재단하고 평가해 버리곤 한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는 법이다.
누군가를 함부로 문제라 부르는 건
그저 내 시선이 머문 찰나가
하필 그 사람의 가장 춥고 시린 겨울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누군가의 삶을 섣부른 가위질로 편집하는 어른이 되지 않기를.
매서운 겨울을 견뎌낸 이에게 기어이 봄꽃이 피어날 때까지,
한 사람의 온전한 사계절을 그 계절대로 볼 줄 아는
깊고 다정한 눈을 가진 어른이 되기를.
오래도록
그 따뜻한 온기를 잃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