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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길 1 12화

가상 무언(架上 無言)

by 최연수

사순절(四旬節)을 보내고 부활절을 지킨 지 일주일 만에, 또 하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본다. 경북 문경시의 폐광산(廢鑛山)에서 50대 남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보도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冕旒冠)을 썼고, 우측 옆구리에는 흉기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발 밑에는 십자가 제작 방법과 십자가에 매는 방법이 적힌 종이도 발견했다고 한다. ‘목을 맨 데 따른 질식사’가 경찰이 본 사인이다. 정황으로 보아서 자살인지 타살인지 분명치 않고, 자살이라도 자살 방조자가 있었는지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가 이혼한 후 수년간 가족과 연락을 끊고 혼자 살았다니 가정환경이 복잡했고, 십자가 죽음을 택했다니 신앙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얼마 전 언론인 최철주씨는 ‘해피엔딩: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에서, 죽음의 질(well-dying)엔 소홀한 우리 현실을 꼬집은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만약 자살이었다면 과연 존엄하게 죽은 선택이었는지, 신앙인이었다면 과연 순교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죽음이었는지... 그의 죽음을 놓고 섣불리 왈가왈부(曰可曰否)해서는 안 되겠지만, 불신자 특히 안티 크리스천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생각하면 몹시 씁쓰레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일곱 가지의 말씀을 남겼다.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이르는데, 사순절 기간에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그는 십자가 상에서 무슨 말을 남겼을까? 현장에 목격자가 없었다면 유언도 무의미하고, 유서도 없었던 모양이다. 차라리 ‘다 이루었다!’는 가상 일언(一言)이라도 남겼다면, 코미디 감이라도 되었을 텐데, 가상(架上) 무언(無言)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라고 한다. 재벌 총수도 대학 총장도, 행복 전도사라는 방송인 심지어 전직 대통령까지 자살한 나라이니, 이제 자살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죽음만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재현하려는 것이라,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산란(散亂)하게 한다.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신앙 고백하는 우리가 아닌가? 자유인으로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여기는 자유는 없다. 내 생명이니까 나 스스로 끊을 수 있는 자유는 없다. 흔히 성전(聖戰)을 내세운 이슬람 교도들의 자폭 테러를 보지만, 기독교에서는 자살은 곧 죄요, 지옥행이다.


블레셋의 침공을 받고 패전하여 중상을 당한 사울 왕이, 자기 칼을 뽑아 그 위에 엎드러져 자결한 기사가 아마 성경상 최초의 자살이 아닌가 한다. 그 후 다윗왕을 모반(謀叛)하다 계략이 실패하므로 목매어 자살한 아히도벨, 이스라엘 7일 천하를 누리다가 오므리의 쿠데타로 스스로 왕궁에 불을 놓고 분신(焚身)한 시므리 사건이 구약에 나타난 자살 사건이다. 한편 신약에서는 은(銀) 30으로 예수님을 팔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목매어 죽은 가룟 유다(행 1:18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음)가 유일한 자살 사건이다.


신문에 보도된 많은 자살 사건 가운데 크리스천도 포함되어 있을 때마다 충격을 받는다. 그 동기가 무엇이건 연민(憐憫)의 정으로 가슴 아파하는데, 이 사건만은 동정심마저 없다. 혹시 정신이상자가 아니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이단(異端) 신앙에 빠진 자가 아닌지 의심이 간다. 그동안 종말론(終末論)에 심취되어 집단 자살한 사건을 보기도 하였고, 부활을 기다리며 시신(屍身)을 방치한 사건, 매장한 시신이 곧 부활할 것이라고 기다리는 사건을 보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불신자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주어 안타깝게 여기곤 하였다.


성경은 말세가 되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사이비 크리스천이 활개를 치고, 이단(異端) 사설(邪說)이 춤출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안타깝게 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은, 이를 경계하고 그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를 구출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이단들이 오히려 반격을 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신앙의 자유의 침해요 곧 인권유린이라며, ‘강제개종교육 피해자 연대(강피연)’까지 조직하여, 시위를 하고(2009.12.29) 고소까지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대법원은 진ㅇㅇ목사에게 유죄 판결을 하였다.( 2008.10.23)‘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야간 공동강요․감금) 혐의를 인정한 것이다. 종교를 떠나서 실정법을 위반했으므로 판결을 시비할 수는 없으나, 앞으로 이러한 논란은 가속화될 예고편이다. 우리는 그동안 비성경적인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수 많은 이단의 행위를 목도(目睹)하고, 이로부터 정상적인 신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이 노력이 과도하여 실정법을 위반한 사례는 바람직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인 이단의 정공(正攻)에 단호하게 맞서야 하는 것은, 이번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더욱 절감하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자살이 아닌 타살이요, 권력자들의 불법적인 형벌이다. 그리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의한 순종이다. 그가 예수님의 수난을 흉내 내고 부활을 기대했다면 하나님의 섭리에 반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모독한 정신병자이자 사이비 기독교인이다. 만약 이를 부추기는 배후가 있다면 전형적인 이단이요, 자살 방조의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다. 이런 이단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를 구출하려는 노력을, 강제개종교육이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인권유린이라고 매도(罵倒)한다면, 또 하나의 자살 방조이다.

기독교는 곧 부활의 종교이다. 그러나 죄인을 포함한 만인의 부활은 아닌 것이 성경적이다. 병고(病苦)․정신장애․애정 문제가 자살의 3대 동기라 하거니와, 그 밖에 생활고․사업 실패․장래에 대한 불안․개인의 이상 심리 등 그 배경에는 복잡한 인격적 사회적 요인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인간의 오만한 반역으로 간주(看做)한다. 기독교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그의 죽음은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9)는 말씀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는 말씀에 따르는 죽음이라면, 성경의 왜곡이요, 십자가의 모독임에 틀림없다. 어느 종교 관계 카페의 회원이라니까, 이런 신앙으로 최면(催眠)시킨 배후가 있다면 이단이요, 그로부터 구출하려는 노력을 강제개종으로 규탄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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