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주님을 믿고 따르는 가정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진정 무엇인지 이 가정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이 우리 교회 한 식구들이라는 것이 참 든든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렇게 끝맺는 기사가 실린 교회 회지 ‘물댄동산’(2011.5.8)이 나왔다. 우리 가정 이야기이다. 가정의 달을 맞이한 특집으로, 가족사진과 함께 ‘우리 교회 믿음의 3대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것이다. 취재하는 집사님이 모범 가정인 우리 가정을 취재하러 방문하겠다기에 극구 사양했는데...‘모범’이라는 글자가 굴레가 되는 것 같아 몹시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두 아들 가족까지 모두 10 명이 모여 있는 자리(2011.4.8)에서, 보태고 뺄 것 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 책이 나가자 여러 사람들은 한 마디로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본래 이런 이야기를 기사화할 경우에는 과장된 포장이 있을 수 있음을 안다.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이면 오히려 무례가 되고, 덕담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취재․편집 진들은, 문장 한 구절에도 퍽 신중을 기하게 된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훈장이나 계급장을 달고 정복을 입으면 언행에 조심하게 마련인 것처럼, 이 포장에 걸맞도록 남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는 무거운 과제를 또 하나 안게 되었다. 20여 년 전, 어머님께서 중풍으로 병석에 오래 누워계실 때, 동사무소와 경로당에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구청에 효자․효부상을 내신 할 것이다는 정보가 새어 나왔다. 그때도 한사코 사양했던 것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속 빈 강정이 언짢고, 자식된 도리만을 했을 뿐인데, 의례적인 행사와 그들 실적에 끼워 넣는 것은 아예 싫었기 때문이다.
반칙하고 우승한 일, 컨닝하고 우등상을 받는 일, 뇌물 받치고 영전․진급한 일.... 어떠한 칭찬이건 상이건 자기의 분에 맞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대접은 달갑지 않다. 아무튼 다시 성찰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이겠지.
나는 영웅․호걸이나 성인․군자를 꿈꾸는 큰 그릇이 되지 못함을 일찍이 깨달았다. 나의 됨됨이와 환경이 그랬다. 고작해서 행복한 가정이 꿈인 小人(소인)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큰 불화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도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늘 쪼들렸으며, 정치운동에 뛰어든 아버님은 가정을 별로 돌보지 않았다. 따라서 일찍 부모 슬하를 떠나 고학과 자취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가족이란 게 얼마나 그리운 존재이고, 가정이란 게 얼마나 소중한 안식처란 걸 절실하게 느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 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내 벗 나의 집 뿐이리.
그래서 H.R.Bishop 작곡 'Home! Sweet Home'을 습관처럼 불렀다. 앞으로 이룰 ‘즐거운 나의 집’을 머릿속에 그리며 말이다. 그런데 작사자 John Howard Payne(1791-1852)에 관해서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의 유해가 아프리카에서 군함으로 귀국 뉴욕으로 돌아올 때, 대통령을 비롯한 고관․귀빈들이 영접하고, 워싱턴 오크 힐 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대단한 인물이기보다는 그 노래 때문이었다니, 새삼스럽게 이 노래의 무게를 알게 된 것이다. 이 노래는 오페라 ‘Clari Maid of Miilan’에서 불린 이후, 만인의 애창곡이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의 일생은 참으로 기구 했다는 것이다. 그는 발 벗고 잘 수 있는 내 집은커녕, 미혼의 몸으로 평생 정착하지 못한 채 방랑 생활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 노래를 쓴 것도 유럽 어느 어둔 골목길을 배회할 때였다고 하니까, 그 영혼의 갈망이 짙게 묻어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반생을 남의 셋방․셋집을 전전했으며, 고된 타향살이를 했으니까 그의 신세와 오십 보 백보였다. 늘 노랑․빨강 불이 번갈아 깜박거렸던 우리 가정에, 마침내 비상벨과 함께 빨간 불이 켜졌다. 청운의 꿈을 품은 채 사직하고 독학을 하려는데, 아버님과 누님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위로는 어머니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두 동생을 양육․교육해야만 했다. 실직자로서 食率(식솔)을 거느리고 공부한다는 일이,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공부는 한낱 백일몽이 되고,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채 방황하게 될지 모르는 절박한 문제에 부딪쳤다. 아들을 그리고 형만을 쳐다보는 눈망울을 바라볼 때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중압감에 휩싸였다.
지구가 되자! 위성인 달을 거느리는 지구가 되어야 한다. 원심력에 의해서 궤도에서 멀리 이탈하려는 가족들을 강한 구심력으로 끌어당겨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무슨 힘이 있다는 말인가? 나 자신도 流星(유성)이 되어 어디론지 타서 사라질 운명인데... 그렇다! 저 태양의 한 행성(行星)으로서, 그의 인력에 따라 궤도를 잡고 그 주위를 돌자. 그리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태양은 곧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힘에 이끌리어 그 주위를 맴돌면, 설마 우주의 미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는 소망을 갖고 말이다.
만 서른넷 나이에 결혼을 하였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면, ‘즐거운 나의 집’을 부르기로 신부와 합의했다. 신자들은 찬송가를 부르기 마련인데, 나는 굳이 이 노래를 부른 것은 나의 소박한 소망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내 벗 나의 집 뿐이리.’
Payne이 되어 불렀는데, 둘이서 2중창으로 불렀으니 얼마나 행복했으랴.
청운의 꿈을 접었으니, 이후 이 과제를 안고 씨름을 해야 했다. 연애는 한 편의 시지만, 결혼은 긴 산문임을 곧 깨닫게 된 것이다. 가정의 목표와 가족들 간의 관계가 바로 정립되지 않으면 ‘즐거운 나의 집’은 또 하나의 공기 빠진 풍선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성공적인 삶이란 ‘방향’과 ‘관계’가 제대로 설정되어야 한다. 방향은 수직적인 ‘신앙’으로, 관계는 수평적인 ‘평화’로 잡았다. 잘 믿고 바로 믿는 가정, 단란하고 화목한 가족. 이 두 가지 제목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마련하여 최초로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가정이 파괴되었다.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가정들이 해체되고 파괴되었다. 가인은 물론 셋의 후예들이 그랬고, 우리가 숭앙하는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도 그랬다. 단절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려면, 먼저 가정이 회복되어야 하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여호수아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고 한 것이나, 예수님께서 세리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눅 19:9)라 한 것이나, 그밖에 자결하려는 빌립보 감옥 간수에게 바울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한 구절 등 개인은 물론, 집(가정)을 바로 세우는 일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성경은 부모 공경 등 십계명(출 20:12)을 비롯하여, 교회와 성도와의 관계를 통한 오륜(五倫)을 얼마나 강조했는가?(엡 5:22-6:4, 잠 20,21,22장) 그리고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오’(딤전 3:5)라 하면서, 교회 직분을 맡길 때는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를 택하라고 권하고 있다.(엡 5:3-13) 이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사서삼경 대학의 8조목)와 같은 의미로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 몸을 닦고 가정을 다스리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자기 개인의 대망과 포부, 높은 이상과 비전(vision)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정을 장애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자기의 명성과 인기를 누리고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가족이 올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또한 적지 않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부부 관계가 파경에 이르고,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파탄이 나서 자녀들에게 비극을 안겨주는가? 집(house)은 있으나 가정(home)이 없고, 사람(man)은 있으나 가족(family)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탁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교회를 섬기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기도하면서 노력해 온 것을, 취재 팀이 어렴풋이나마 감지했던 게 아닌가 싶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의 사례와 행복의 조건으로 손꼽는 그 무엇 하나 갖춘 것이란 없다. 다만 잘 믿고 바로 믿자는 ‘방향’만은 뚜렷하고, 단란하고 화목한 가족 간의 ‘관계’만은 아직 끈끈하다. 지금까지 내가 쓴 20여 권의 책 모두가, 돈 되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읽히고자 함이 아닌 것은, 모두가 우리 가정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록 하잘 것 없으나 나의 소박한 꿈이기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꿈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것 들이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찬송가 559장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 네 집 네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와 같이 복을 얻으리로다’(시 128:1-4)는 말씀은, 명절날 우리 가족 전체가 모인 가정예배 때 즐겨 부르는 찬송이요, 묵상하는 성경 구절이다.
한편 ‘〜기쁜 날 기쁜 날 oo의 생일 날...’로 부르는 찬송가 285장과,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 2:40, 눅2:52)는 성경은, 아이들 생일 축하 예배 때 낭송하는 말씀으로 굳어졌다. ‘부부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일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고 벤자민 솔이 말했다. 이것이 ‘즐거운 가정’의 핵(核)이 아닐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