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길 2 12화

안녕, 반포의 봄아

by 최연수

내가 떠나고자 함이 아니라, 네가 나를 밀어내듯이 서둘러 떠나보내려 하는구나. 아직 3월인데, 꽃샘바람도 부는 일 없이 이렇게 꽃 잔치를 베풀어 주니 말이다. 두 돌도 채 안된 막내 딸내미를 안다가 걸리다가, 반포의 첫봄을 만나보려고 이곳저곳 나들이하던 때가 엊그제 같구나. 옷소매로 파고드는 스산한 바람에 몸을 웅크리고, 아직 엉성한 주택 단지 한쪽 구석만을 거닐었지. 마음 한 구석에 사막이 생기고 모래바람마저 일어 차마 정들 것 같지 않더구나. 이제 과년이 된 딸내미와 팔짱을 끼고, 그 발자국을 따라 여기저기 걷고 보니 어쩐지 코끝이 찡하다.

개나리․진달래․산수유․박태기꽃․명자꽃 그리고 동백과 목련이 벌써 떠날 채비를 하는가 하면, 4월 중순이라야 한창일 벚꽃들이 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구나. 5월의 여왕 장미가 대관식을 가지려면 달포나 기다려야 하거늘, 모란․작약․라일락과 함께 꽃눈을 바스스 뜨고 있다. 튤립과 수선화 히야신스, 심지어 야생화인 민들레와 제비꽃...

요즘 날씨가 92년 만의 초여름 기온이라니, 온갖 꽃들이 동시 다발로 한꺼번에 다투어 피는 일이 내 생애 처음이겠지. 조숙하면 쉬 늙게 마련이고, 속성수는 오래 살지 못한다고 전문가는 말하는데, 무엇 때문에 모두들 이다지도 안달복달이 났을까?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님을 찾아오시는고....

올해 따라 알록달록 유난히 고운 자태를 뽐내는 꽃들의 눈인사가 더할 나위 없이 고맙긴 하다. 허밍으로 ‘봄처녀’를 불러보는데, 화답이라도 하듯이 직박구리 한 쌍이 날아오고, 뒷따라 귀여운 동박새 한 마리도 날아오더니 새봄을 노래하는구나. 문득 쳐다보니 메타세쿼이아가 5층 옥상을 훌쩍 넘어섰고, 큰 길가 가로수 수양버들이 프라타나스로 대체되었는데도, 이것마저 고목이 되어 우뚝 버티고 서있다. 저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단풍나무․꽃사과에 새 움이 돋고, 형형색색의 영산홍들이 일제이 망울을 터뜨리면 바야흐로 이 큰 꽃대궐은 녹음방초(綠陰芳草)가 되겠지.

뜻밖에 K와 맞닥뜨렸다. 내가 과천시장이라 부르는 그가 과천으로 이사간지 오래인데, 향수를 달래기 위해 고향의 봄이 그리워 불현듯 찾아왔단다. 그의 머리에 하얀 살구꽃이 피었구나. 검정 내 머리에 살구꽃이 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흘러간 세월을 손꼽아 세어보니 아, 35년째. 딸내미는 부지런히 셔터를 누른다. 그에겐 고향이 될 이곳의 추억을 오롯이 담고 싶겠지. 여름이 되면 우리 현관 앞 능소화가 떠나간 그의 생일을 여늬때처럼 화사하게 축하해 줄까? 가을이면 우리 집 앞 감․매실․대추․모과는 어김없이 주렁주렁 열려, 지하철 손님들의 눈길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겠지.

흑석동 뒷산에 올라 굽어보면 한강에 반달섬(서래섬)이 떠있었다. 홍수가 나면 상습적으로 침수가 된 지역이었다. 이 지역 모래땅 위에 한강 이남 최초로 비둘기장 같이 조성된 것이 곧 반포아파트 단지이다. 뜨락에 꽃나무를 가꾸며 나비․새들과 함께 살다가, 회색 콘크리트 숲 속에 갇혀 산다는 게 탐탁지 않아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사 왔었지. 게다가 그 겨울 유류파동을 겪고 나서 첫 봄을 맞이했던 그땐, 받침대에 기대어 선 가냘픈 나무와 꽃들도 볼품없이 초라했었다. 게다가 눈인사도 없이 지나치는 쌀쌀맞은 인정에 되돌아가고픈 심정을 달래느라고 퍽 애를 썼지.

그러나 이곳 반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세 아이들 이곳 반포학교를 나왔으며, 두 아들 장가 들여 이웃에 함께 살면서 세 손주까지 보았다. 이렇게 3대에 걸쳐 30여 년을 살았다면 고향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겠지. 그런데 떠나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하지 않았던가?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요, 거기서 그는 복이 될지라고 하였다.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를 거울삼아야 하거늘, 무언가 잃은 듯 아쉬워 이렇게 지난날을 떠올리며 거닐고 있는가?

없는 것 빼고는 다 갖춘 헤아리기 힘든 수목과 화초들이 큰 식물원을 이룬 곳. 그러나 너무 애상(哀傷)할까 그러는지 물망초(勿忘草)는 없구나. 오랜만에 내일이면 비가 온다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꽃들이 주저리주저리 옹색하게 매달리고, 후드득후드득 꽃비가 내린다면 어이하랴. 곧 실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게 되면 이럴까? 한 송이 꽃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뜬 채 몇 시간 꽃길을 거닐고 나니, 벚꽃에 한층 눈이 부시구나. 어느 봄인들 다르랴만, 며칠 후면 헤어져야 하는 반포의 봄은 단장한 신부처럼 누구와 비길 데 없이 빼어나게 아름답구나. 아침에 까치가 와서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데, 저 까치들은 우리를 배웅하느라 저렇게 지저귀나 보다.

몇 십 년 동안 우리 앞마당처럼 드나들던 현충원과 반포한강시민공원, 그리고 허밍웨이로 부르는 반포천 둑길... 언제 다시 찾아오면 여전히 반가이 맞이해 줄까? 하기야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이곳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날이 멀지 않으니, 어차피 정을 떼고 떠나야 한다면 이렇게 성대한 꽃잔치를 대접받고, 하루라도 먼저 미련 없이 떠나는 우리가 더 잘한 일이 아닐까? 설마 다시 돌아와 이 품에 안겨 사는 날은 없겠지. 사노라면 얼기설기 미운 정 고운 정이 있게 마련이고, 미운 정을 되새기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텐데, 고운 정만 고이 간직한 채 웃음 지으며 떠나게 된 우리는 암 행운아고 말고.

그동안 어머니 같이 포근하게 안아준 반포의 봄아, 이제는 안녕!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이렇게 앞당겨 만화(滿花)로 환송연(歡送宴)을 베풀어준 반포의 봄에게, 비록 몸은 늙고 목소리는 낡았지만, ‘동심초(同心草)’ 노래로 답사를 대신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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