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길 2 11화

정들어야 고향이지

by 최연수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 쪽.

논에서 떠돌아다니는 개구리밥(浮萍) 신세를 한탄하면서, 이 ‘타향살이’ 노래로 회향병(懷鄕病)을 낫고자 했던 부모 세대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으랴. 그 험한 역사의 격랑 속에서, 스무 살 안팎의 풋내기 부부들이 어린애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타향을 전전하던 삶을, 내가 어른이 되어서야 다소간 깨닫게 되었다. 오랜 타향 생활로 심신이 지치고 외로울 때면 먼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망향가를 부르고, 향수의 시를 읊곤 했다. 퍼내어도 퍼내어도 샘물 같이 괴는 것! 아닌 게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 촘촘히 감겨진 시와 노래의 실타래를 모조리 풀어내면 속이 후련해졌다.

우리말 향수를 뜻하는 노스탤지어(nostalgia)는 그리스어 노스토스(歸鄕)와 알고스(苦痛)의 합성어라고 한다. 17c 스위스의 의사 호하네스 호퍼 박사가 썼던 이 단어는, 스위스 용병들이 고향을 그리워한 나머지 갖가지 질병, 심지어는 죽음에 까지 이르는 증상을 연구한 것이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한결 같이 고향 산골짜기의 풀 뜯는 소 방울 소리까지 들린다고 했다. 이렇게 뇌에 이상을 일으킨다는 이 회향병은 그만큼 중증인가 보다.

명절 때 귀성객의 민족 대이동, 북쪽을 향해 망향제를 올리는 실향민, 죽으면 고향 선산에 묻히겠다는 소원, 북군 포로 유골의 귀향, 노후엔 하향하겠다는 계획, 금의환향(錦衣還鄕)이 꿈이었던 옛 선비들. 애굽 땅에서 죽어도 가나안 고향 땅에 해골을 묻으라고 유언한 야곱(창 49:29)과 요셉(창 50:25)...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향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싶다. 강에서 부화된 稚魚(치어)로 바다로 내려가 성장했다가, 成魚(성어)가 되면 다시 고향 강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는 연어의 귀소성(歸巢性)의 DNA가 사람에게도 있다는 말인가?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을 이따금 받는다. 단답으로 말하기에는 사연이 많아, 어떤 때에는 고향이 많다며 얼버무리기 일쑤다.

송촌(松村)

“니 안태고향은 송촌이다 잉. 니 태를 저 냇가에 묻었은께”

외할머니께서 넌지시 던진 이 말씀은 귓속에 박혔다. 타향살이하던 어머니는 친정에서 나를 낳았다. 이 집안 첫아기였다. 이듬해 친손자도 얻는 경사가 겹쳐 듬뿍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이 마을은 교통이 불편한 벽촌이다. 경관이나 특산물 고적 등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농촌이다. 그러나 외갓집의 짙은 사랑의 품에 안기고 싶어 자주 갔다. 선산이 있고 우리 성씨의 집성촌인 아버님의 고향이 咫尺(지척)에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안태(安胎) 고향인 여기에서, 88번의 손길이 닿아야 쌀(米) 한 톨을 추수한다는 바쁜 농사 일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農繁期(농번기)에도 아랑곳없이 내 집처럼 철없이 까불며 뛰놀았다. 오죽하면 외숙께서 ‘초라니’라 했을까?

그런데 6.25 전쟁 때 이곳에 잠깐 은신한 게 빌미가 되어, 붉은 손의 할퀸 자국이 너무 크고 아팠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 오랫동안 발걸음을 끊었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청년이 되어 여기에서 잠깐 공부도 하고, 회갑이 지나 아내와 함께 들렀다. 물론 붉은 물은 씻은 듯이 바래고, 우리 때문에 고통당했던 어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먼 산에 진달래 울긋불긋 피었고/ 보리밭 종달새 우지우지 노래하는...

고락(苦樂)이 씨줄 날줄로 엮어진 내 발자국을 따라, Molly Daring(미국 민요. 윤복진 시)의 노래를 부르며, 도지려는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여기저기 걸었다.

마량(馬良)

유년 시절은 남쪽 끝자락인 이 포구에서 자랐다. 누나와 함께 갈매기가 너울대는 갯가에 나가서 모래성도 쌓고, 조가비로 소꿉놀이를 하였다. 썰물 때는 우리 조무래기들은 개펄에 빠지며 까막섬에 다녀오기도 하고, 빈 배에 올라 뱃놀이도 하였다. 커다란 눈방울로 팔딱팔딱 잘도 뛰어다녀 모두들 나를 ‘짱뚱이’라 불렀다. 그러나 태풍의 피해를 입은 데다가, 학령(學齡)이 되어 邑(읍)으로 이사를 하였다.

백발을 흩날리며 어느 해 불현듯 이곳을 찾았다. 제법 큰 어촌인 면(面)으로 승격되어 있었다. 설마 천연기념물로 유명해져서일까? 까막섬은 이 나그네를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고, 모래밭에 내 발자국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은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가고파’(이은상 작시. 김동진 작곡)를 허공으로 날렸으나, 음산한 날씨와 더불어 불청객 같은 어색함이 날 뒷걸음치게 하였다.

장흥(長興)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의 ‘황국신민의 맹세’(皇國臣民の誓い)를 달달 외웠다. 전시체제 밑에서 오후에는 勤勞動員(근로동원)에 나서고, 수시로 방공연습을 하였다. 군가를 부르며 神社參拜(신사참배)에 나가서는 일본의 승전을 빌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늘 허기졌으나, 뒷동산에 올라가 대나무 대포와 솔방울 포탄으로 미국의 B29기를 격추하고, 냇가에서 멱감으면서도 잠수함이 되어 敵艦(적함)을 침몰시키는 전쟁놀이를 즐겼다.

어리둥절하게 해방을 맞았는데 기쁨은 잠깐, 좌․우익 사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좌익 아이들은 나를 따돌리고 귀찮게 굴었다. 심지어 그들의 선동에 따라 同盟休學(동맹휴학)까지 끼어들었다. 주눅이 든 나는 학교가 무서웠다. 좌익의 못자리라는 중학교 입시에도 낙방한 채, 집 안에 틀어박혀 재수를 하였다. 주위의 뱀이 설치는 통에 가위눌린 흉몽으로 식은땀을 흘리곤 하다가, 여․순(麗․順) 사건의 여파로 밤엔 피신하느라 戰戰兢兢(전전긍긍)이었다. 이듬해 난 광주로 유학(遊學)을 떠났지만, 마침내 불뱀의 화신인 共匪(공비)에 의해 집이 전소되고, 가족들 생명만 간신히 건졌다.

발자국이 아닌 화인(火印)이 이렇게 찍힌 곳. 정이 삼천리로 떨어져 뒤돌아 침 뱉기도 싫은 이곳을 고향이라고 할 수 있으랴. 아내의 권유에 못 이겨 회갑이 지나서야, 가슴속에 붕대를 친친 감고 이곳을 찾아보았다. 뛰놀던 골목길과 벌거숭이로 멱감던 탐진강, 시큰거리는 콧날을 만지며 불탔던 두 곳의 옛 집터도 돌아보았다. 뻔질나게 오르내리던 남산에 올라 몰라보게 변한 읍내를 조망하며, 허밍으로 ‘옛 동산에 올라’(이은상 작시. 홍난파 작곡)를 불렀다. 자꾸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광주(光州)

轉禍爲福(전화위복)으로 이념 싸움 없는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6.25 전쟁의 참극 속에서 우리 이산가족은 보호색과 의태(擬態)로 생명을 건졌다. 수복이 되어 복학을 했으나, 학업을 계속할만한 환경이 못 되었다. 고학과 자취만이 돌파구였고, 이의 원동력은 강한 의지와 인내뿐이었다. 勉學(면학)만이 마치 생의 목표 같이 되었다. 학창 시절의 낭만이란 사치였으며, 오직 스승님들의 사랑과 책들이 벗이 되어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문득 고향이 그립고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오면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며 외롭기 한이 없네...

남창을 열고 ‘고향 생각’(현재명 작시, 곡)을 부르면, 정나미가 떨어졌던 장흥까지도 그 정경들이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졸업 후 서울에 올라오는 야간열차 안에서도, 줄곳 고향 노래를 흥얼거렸다.

서울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상경했건만 한 마디로 환상이 깨졌다. 폭격 맞아 앙상한 건물과 푹 파인 곳곳의 도로, 그리고 천막 교실.

‘눈보라는 보따리를 스쳐가는데/ 허물어진 처마 밑에 밤을 새우고....’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을 앓는 아이들은 ‘피난 살이’ 동요를 구슬프게 곧잘 불렀다. 얼어붙은 이들 가슴을 녹여줄 수 있는 훈훈한 노래는 ‘고향의 봄’(이원수 시, 홍난파 곡), ‘고향 땅’(윤석중 요, 한용희 곡) 따위라고 생각하며 가르쳤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푸른 하늘 끝 닿은 여기가 거긴가...

그러나 동요는 물 위의 기름처럼 떠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어이하랴.

독학과 자취의 학창 시절로 되돌렸다. 게다가 두 번째의 화마에 쫓겨, 20여 년 정착한 장흥을 등지고 온 가족들이 빈손으로 상경하였다. 불카누스(Vulcan)와의 불꽃 튀는 결투가 시작된 것이다. 계속된 비운은 망울지는 내 꿈나무를 검정 숯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서울에서만도 떠돌이 생활을 떨치지 못했다.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는 짧아서 귀하다는 청춘은 이미 무덤에 묻고 30대에 들어섰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면서 겨우 안정을 찾았다. 생의 3/4을 서울에서 살았으니 고향일 것인가?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

백일홍도 심어놓고 옥수수도 심어놓고...

이 가요는 정들면 고향이라는데 정들어야 고향이지, 과연 내가 정든 곳은 어디일까? 살았던 모든 곳을 고향이라 치면, 나처럼 고향 복이 많은 사람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많다는 것은 곧 없다는 것.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줄 땅으로 떠났으므로 복을 받았지 않았느냐? 어디라도 고향이라 여기고 정 붙이며, 누구라도 부모 형제로 여기면서 사랑하고 살아야지 다짐해 보았다. 그렇지만 내가 늙어 돌아가 살고 싶고, 죽어 뼛가루라도 뿌리고 싶은 곳이 이 땅 위에는 없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 *

내 본향 가는 길 보이도다/인생의 갈 길을 다 달리고....

사막 같은 고된 인생의 나그네 길에서, 노래 속에서만 신기루 같이 어른거리다가 이내 사라지는 고향. 그래서 늘그막에 장례 예배 때 자주 부르는 이 찬송(479장, 607장)이 가슴속에 고이기 시작했다. 가보지도 못했으나 하늘나라가 내 고향이라고 믿으며 산다. 육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되 영은 하늘나라로 돌아간다고. 그렇다면 어차피 우리는 나그네요 이 세상은 旅人宿(여인숙)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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