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을 방문했다.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지난날을 돌이켜 본다는 것은 늙었다는 증거인데, 옛 추억을 더듬어본다는 낭만의 안경을 끼고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고리탑탑하다고 애써 눈길을 돌렸던 여러 물품들에게 더 시선이 쏠린 것은 웬일일까? 하찮은 애물단지로 여겨 매몰차게 버렸던 물품들인데, 그 누가 주워다가 상전 모시듯 여기에 전시해 놓았을까? 아닌 게 아니라 옛 어른들의 체취가 스며있고 옛 고향의 정경들이 어스름하게 펼쳐지는 이곳에 오면, 따스한 안방 아랫목에 누워보는 느낌이다. 이것저것 둘러보다 문득 신발 전시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랜 세월 신이라고 해왔는데, 굽이 덧붙어 신발로 바뀌었다. 국어사전에 함께 쓰이고 있으니 불편은 없다.
어렸을 적에는 주로 게다를 신었다. 나무로 만든 일본 나막신인 셈이다. '20년대에 첫선을 보였다는 고무신도 구멍 뚫린 헌 것조차 신주 모시듯 했던 시절이다. 농촌 서민들은 고급인 미투리보다는 주로 짚세기를 신었는데, 외사촌 동생이 짚신을 잘 삼아 선물로 한 켤레 주었다. 추운 겨울 발이 시려 교실에서 덧신 삼아 신었는데, 아이들이 소나 신고 다니는 조우리를 신는 촌놈이라고 약 올리는 바라에 일회용으로 팽개쳐버렸다.
신과 짝이 되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양말이다. 버선과 다비(일본 버선)가 환생, 양말로 세대교체가 되었는데 구멍이 잘 났다. 전구를 넣어 구멍을 꿰매어 신었는데, 어머니들의 바느질 솜씨를 가늠해보는 일거리였다. 효자 노릇하느라고 뜨개질을 익혔다. 무명실로 두툼하게 양말을 떠서 신었는데, 계집애 못지않게 눈썰미가 있어 주문이 쇄도하여 즐거운 비명.
해방이 되어 미군이 진주한다고 작은 고을이 발칵 뒤집혔다. 아이들을 길가에 눕혀놓고 탱크로 밀어버린다는 그 귀축 미군을 환영한다니... 게다 신은 쪽발이는 잡아간다는 바람에 우리 아이들은 죄인처럼 눈치를 보며 맨발로 어른들 틈에 끼어들었던 해프닝도 있었다.
그 무렵 고무장화를 사 신었다. 자가용 승용차를 처음 마련한 사람들의 기쁨이 이럴까? 목마르게 하늘만 쳐다보던 참에, 드디어 비가 내려 설레는 가슴으로 장화를 신었다. 닳아질까 봐 머리에 이고 가고 싶었으나, 이건 신는 게 아니라 자랑스럽게 타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오려는데, 신장에 장화가 없는 게 아닌가? 부러움에 젖은 아이들의 눈망울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다시 타고 갈 장화 생각에 공부 따위는 뒷전으로 밀려났는데... 빗물처럼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뒤범벅된 채 부옇게 흐린 눈앞에는, 회초리를 든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만 뒷걸음치게 하였다. 그야말로 비 맞은 닭이 되어 맨발로 후줄근하게 돌아왔다. 어느 얌체를 태우고 갔는지, 외마디 소리 한 번 못한 채 속절없이 끌려가버린 장화가 얼마나 야속한지.
학창 시절에는 흰 운동화를 시었다. 주말 빨랫감 제1호가 운동화였는데, 황토 색이 배거나 누렇게 퇴색된 것을 어떻게 희게 할 수 있느냐는 과제와 씨름을 했다. 횟가루나 분필가루를 칠해서 햇볕에 말리거나, 심지어 밀가루를 물에 타서 칠하기도 했다. 운동화 역시 구멍이 나면, 얼기설기 꿰매어 신기도 했다. 농구화가 새로 등장했으나 나에게는 그 림의 떡이었다.
교사 발령을 받고 서울로 오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 가죽 구두를 신고 사회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삼촌께서 축하의 뜻으로 맞추어 준 선물로, 미군의 헌 군화를 개조한 구두였다. 그러나 애지중지한 이 것을 그만 잃어버렸다. 학교 신장에 넣어둔 것을 도난당한 것이다. 학부모들이 학교를 맘대로 드나들던 시절, 하필이면 귀한 내 구두를.
'내 구두!'
내 눈을 의심했다. 허탈하여 대신 슬리퍼를 끌고 퇴근한 길목인데, 내 구두가 나를 못 본 척 무정하게 누워있는 게 아닌가? 길바닥에 펴놓은 돗자리에서, 또 다른 신들과 함께 다정하게... 주로 헌 신발인 걸로 미루어 모두 장물이었을 것이다.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내 구두!'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온 이 말을 꿀컥 삼키고 말았다. 내 구두라는 증거를 어떻게 주장하며, 제자들이 오가는 길바닥에서 신 장수와 삿대질하며 악다구니 싸움판을 해야 한다니...
하는 수 없이 난생처음으로 그 당시 제화계의 메카였던 '금강'에서 새 구두를 맞추어 신고 '잠자리 포수'가 되었다. 닳아질세라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 잠자기를 잡으러 다니는 아이들처럼 보였으리라. 친구가 붙여준 별명이 되어 버렸다.
5,60년대만 해도 영등포는 진등포라 했다. 포장되지 않은 길바닥이, 비만 오면 수렁으로 변해,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고 했다. 누구를 만나면 구두 먼저 내려다보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했던 시절이다. 쥐꼬리만 한 월급 쟁인데, 구두닦이 소년들 호주머니로 어지간히 용돈이 새어나가곤 했다. 그들의 왁스 칠 솜씨도 급수가 있어, 잘 나간 소년들의 수입은 우리보다 낫다고 했다.
사직을 하고 책벌레 되어 집 안에 칩거하면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검정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녔다. 그리스 철학가 디오케네스가 되어, 비록 통 속에서 살고는 있지만,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위대한 햇빛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니 어찌 외모와 몸치장에 신경 쓸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랴. 만약 내 영롱한 꿈이었던 그 빛이 프리즘을 통과했으면, 분광된 무지개 빛 예쁜 꽃신이 되어 가보가 되었으련만. 고난의 발자국만을 남긴 죄 아닌 죄로 고발을 받고 찢긴 채 유형되고 말았다. 이제 와서 재심을 하여 꿰매어본들 부활할 수 있으랴. 오호라, 검정 고무신이여!
회갑이 되어 등산을 시작했다. 큰 아들이 등산화를 마련해주면서, '이제 닳을 때까지 등산하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등산화를 신고 다람쥐처럼 안전하게 산을 오르면서 분신처럼 애지중지하였다. 그런데 지리산 등반 때 무릎 탈골 사고를 당한 후, 의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쉽게 등산을 접고 이내 등산화도 처분하였다. 운동화로 야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헤어진 등산화가 어찌 그리운지.
새삼스럽게 신발을 내려다본다. 언제 어디든 나와 동행해 주는 신발이 고맙다. 요즘은 주로 이 운동화를 신는다. 값은 구두 못지않게 비싼 편이지만, 디자인도 다양하고 활동하는데 얼마나 편리한지... 늘그막에 한국 전통 무용을 하면서 비록 인조 가죽이지만 당혜를 신지 않나, 딱 한 번이었지만 토우 슈우즈 대용으로 실내화를 신고 발레를 하지 않았나... 신발에 얽힌 얘깃거리가 적지 않구나.
이곳에 게다와 고무신이 없어 아쉽지만, 짚신과 나막신 그리고 가죽신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짚신장수 아들과 나막신 장수 아들을 둔 노모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와 같이 동전 뒤집듯 생각만 뒤집으면 인생관이 달라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짚신과 가죽신을 보니 연암의 '낭환집'에 실려있다는 백호 임제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가 말을 타려는데 종이 "나으리께서 취하셨군요. 한쪽에는 가죽신, 다른 한쪽에는 짚신을 신으셨으니.." 하였다. 백호가 종을 꾸짖기를 "길 오른쪽을 지나가는 이는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왼쪽으로 지나가는 이는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서 있는 자리, 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게 인생사가 아닐까?
'누군가의 신발을 신어 본다'는 것은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다'를 뜻한다. '다른 사람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가보자 않고는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속담이 잇듯이 신발은 이렇게 중요하다. 어렸을 적 지게에 산 더미처럼 짚신을 지고 장마당에 나와 팔던 그 할아버지, 일제 강점기에 유창한 일어로 게다 가게를 하던 기노시다씨 신혼부부가 생각난다. 해방 후 이사 와서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고무신 가게를 하여 부러움을 받았던 장쇠네와, 해방 직후 일본에서 귀국하여 구두 수정 가게를 하였던 이웃집 마사꼬네... 모두들 다정했던 이웃들을 겹쳐 떠올리며 박물관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