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타령
둘기가 떼지어 자랑스럽게
머리 위를 빙빙 날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까치 떼거리가 몰려와
악다구니를 해도
짐짓 시치미떼고,
오리들이 쌍쌍이
눈 앞에서 노닐어도
거들떠 보지 않네.
가슴에 흰 치레깃을 한 채
고개를 훤칠하게 들면
그 고상한 모습을 보고
누군들 외톨이라고 혀를 차랴.
회색 도롱이 걸쳐 입고 움츠린 채
떠도는 조각 구름만 쳐다보고 있는 건
아웅다웅 시끄러운 세상에
물들지 않겠노라는 게 아닌가?
(2022. 2. 25)
한 시간 남짓 반포천을 산책하는 건 하루 일과 중 하나다. 혼자 걷기도 하고 때로는 아내, 딸내미와도 도란도란 얘기하며 걷는다. 도심 속에 이런 개천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여러 가지 야생화와 관목들을 보는 것도 좋지만, 갖가지 새들과 마주친다는 건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왜가리는 하루만 안 보여도 궁금한 새다. 그런데 왜 혼자 있을까? 요즘은 한 마리가 늘었는데도 서로 떨어져 있다. 어리다면 고아(孤兒)일 텐데, 짝이 없는 홀몸인지, 아니면 새끼 없는 할아비인지...왜가리도 군집(群集)생활을 한다는데, 그리고 깃들을 수 있는 둥지는 있을 법한데, 그 곳에서도 사고무친(四顧無親) 늘 외톨이일까?
홀로 쓸쓸하게 있으면 고독(孤獨)하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엔 혀를 끌끌 차면서 측은하게 느꼈다. 그러나 가슴에 흰 치레깃을 한 채, 고개를 쳐들면 그 우아한 자태에 매료(魅了)되지 않을 수 없고, 날개를 활짝 펴서 당당하게 날아가면 때로는 건방지게 느껴진다. 그리하여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사라지고, 오히려 잘난 체 하는 것 같아 그 고고(孤高)함이 못 마땅하게 보인다.
비둘기들이 떼지어, 왜가리 머리 위를 빙빙 날아다닌다. 마치 평화의 사도(使徒)인양 우쭐대며 말이다. 그러나 왜가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까치 떼거리들이 주위에 몰려와 악다구니를 한다. 그런데 왜가리는 짐짓 시치미뗀다. 오리들이 쌍쌍이 눈 앞에 와서 노닐며 금실지락(琴瑟之樂)을 뽐낸다. 그래도 왜가리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무심하고 무정한 것인지, 의연(毅然)한 것이지...
그러나 회색 도롱이를 걸쳐 입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꼼짝 않는 왜소(矮小)한 모습을 보면 다시 측은해진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어렸을 적 까막섬 솔밭에 무리 지어 춤추는 왜가리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으며, 6.25 전쟁 때 피신해 다니면서, 논두렁에 거니는 왜가리를 보면서 쓸쓸하게 여기기는커녕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 왜가리들의 후손일 텐데.
가까이 다가가 사진이라도 찍으려 하면, 어느새 눈치 채고 후드득 날아가버린다. 요즘 선거철이 되어 얼굴을 내밀어 사진 찍어 달라, 자기 말을 들어 달라 안달복달하는데, 그런 구정물에 물들거나 그런 진흙탕에 빠지지 않겠다는 게 아닐까? 비록 홀로 있어도 쓸쓸하지 않고, 남이야 뭐라 하건 남에게 의지하여 구차(苟且)하게 사느니 차라리 홀로 떳떳하게 살겠다는 게 아닌지. 저 왜가리를 보노라니 고운야학(孤雲野鶴)이 생각난다. 하늘을 떠도는 한 조각의 구름과, 무리를 떠나 혼자 사는 학(鶴)이란 뜻으로, 세상의 평판이나 명성을 떠나 홀로 은거(隱居)하는 선비의 비유다. 자기만 최고인 척 독선적인 요즘 입후보자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과는 한참 거리가 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