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타령
싸라기 한 톨 밥 알 한 개라도
허술하게 여기면,
배를 곯고 가난해진다고
되새김하며 자랐지.
벼 이삭 물결치는
들녘을 지키느라,
허수아비를 벗 삼아
참새 떼 쫓으며 자랐지.
이팝나무 아래서
풍년을 빌며,
논바닥에서 여든 여덟 번
손질할 때 흘린 땀방울이
쌀알로 영글었노라고
쌀밥 한 그릇 놓고 감사했지.
소낙비 눈보라와
맞서 싸우면서,
여든 여덟 고개 넘느라
흘린 눈물방울이
쌀 나이로 여물었노라고
쌀독 앞에서 감사한다.
쌀이 주식(主食)인 우리가 밥을 굶는 것은 곧 죽음이었다. 이밥과 고깃국을 먹이겠노라고 호언장담(豪言壯談)한 북한 정권이었지만, 1990년대 소위 ‘고난의 행군’에서 100만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나왔다고 한다. 남한도 내가 교직에 있던 60년대만 해도 결식(缺食) 아동들에게 강냉이 빵을 배급해주고, 점심 시간이면 쌀을 절약하기 위해 혼식(混食) 검사를 했던 일이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일제 강점기(强占期) 특히 세계 2차대전 막바지, 쌀을 공출(供出)하고, 배급 쌀이 턱도 없이 모자라 구황식물(救荒植物)인 쑥·도토리·솔잎·무릇 등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때 적국인 べいこく(米國)를 쌀 나라로 알고 은근히 미국을 부러워했으며, 끈기가 없어 모래알 씹는 듯한 알남미(安南米 베트남 쌀)밥을 먹으면서도, 이모작(二毛作)을 한다는 안남(安南)을 부러워했던 우리가 아닌가? 게다가 나는 6.25전쟁 후 복학(復學)하여 자취(自炊)할 때 눈물을 섞어 메밀응이를 쑤어 먹기도 하고, 60년대 사직(辭職)을 하고 독학(獨學)할 때, 밀기울 죽으로 목구멍에 풀칠을 하면서 책 속의 검정 활자가 흰 쌀이었으면 했던 일도 있었다.
소읍(小邑)에서 살았던 나는 농촌 외가에 자주 갔다. 농업이 천직(天職)이었던 외숙(外叔)은, 이따금 가장 귀한 열매와 가장 귀한 꽃이 무엇이냐고 묻곤 했다. 머뭇거린 나에게 그건 나락(벼의 방언)이요 목화(木花)라고 강조했다. 의식주(衣食住)가 생활의 기본이었으니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천수답(天水畓)을 짓던 농부들은 하늘만 쳐다본 채, 꽃이 밥알을 닮았다는 이팝나무 아래서 꽃이 많이 피기를 빌며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신목(神木)에 꽃이 시원찮게 피었거나,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흉년이 들어 벼 농사를 망친 농가는 망연자실(茫然自失) 초상집 같았다. 어찌 농가뿐이었으랴. 쌀독. 뒤주 밑바닥 긁는 소리에 한숨짓던 아낙네들의 설움을 무엇에 비하며, 꽁보리밥이라도 하루 두 끼 먹기조차 어려워, 허기져 빈 손가락만 빨았던 어린 애들의 설움을 요즘 세대들이 짐작이나 하랴.
유식한 사람들은 논에서 여든 여덟 번 손질하며 땀방울을 흘려야 그게 쌀알(米)로 영글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싸라기 한 톨, 밥 알 한 개라도 허술히 여기면 배를 곯고 가난해진다는 어른들의 말을 되씹으며 자란 세대들이 지금 졸수(卒壽九十세)· 미수(米壽八十八세)가 되었다. 쌀나이? 굳이 미수(米壽)를 낯선 우리 말로 이렇게 풀어 써야만 하나? 곧 여든 여덟살 나이라는 뜻인데, 기왕 쌀 이야기가 났으니 그래야 실감이 난다. 동양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하였으며, 성경도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시90:10)’라 하였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 이라는데 미수·졸수는 하나님의 은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고개를 넘으며 여든 여덟 번 산전수전(山戰水戰) 혹은 산전수전(山田水田)다 겪어온 동안 어찌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랴. 이렇게 늘그막에 굶지 않고 배부르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한편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처럼 남에게 쌀 한 됫박이라도 나눌 수 있다는 지금의 삶이 참으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구황식물(救荒植物)이었던 초근목피가 오늘날 힐링(healing)식물로 대접 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