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국립현충원 현충지에 노란 창포가 한창이다. 옛날 아낙네들은 단오날이 되면 잎과 뿌리를 우러낸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물에도 섞었다지. 우리 아파트 정원에는 청람색 붓꽃이 몇 군데 피어있다. 꽃창포는 꽃 안쪽에 노란 무늬가 있고, 붓꽃은 붓으로 그린듯한 얼룩무늬가 있으며, 봉오리가 먹물을 머금은 붓처럼 보인다. 그런데 얼추 보면 서로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다. 일반적으로 창포(菖蒲)를 Iris라 하는데, 붓꽃 중 수창포(水菖蒲)를 Iris라고 하니 헷갈릴법도 하다.
지하철 1호선 도봉산역에서 내리면 바로 서울 창포원. 눈을 들면 우람한 도봉산과 아름다운 수락산이 양쪽에서 껴안아주고 있다. 의정부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관심이 있었는데, 단오날이 낀 6월은 창포꽃 철이라 찾아왔다. 입구의 방문자센터 위에는 문정희의 시 ‘꽃 한 송이’가, 앞에는 창포꽃에 얽힌 그리스 신화와 또 다른 설화, 그리고 마네․모네․마티스의 창포꽃 명화가 게시판으로 줄 서 있다.
Iris의 아리따움과 단정함이 마음에 든 헤라 여신이 그녀를 시녀로 삼았는데, 바람둥이 남편 제우스신이 그녀를 유혹한다. 이를 뿌리친 그녀가 대견스러워 헤라는 무지개 목걸이 선물과 함께, 하늘을 건널 수 있는 영광까지 주었다. 그리고 향기론 입김을 세 번 뿌려 축복했는데, 그 때 입김에 서린 물방울이 땅에 떨어져 꽃으로 핀 것이 이 꽃이다. 그래서 그리스 말로 ‘무지개처럼 찬란한 꽃’이 되었단다. 한편 이탈리아 어느 마을에 Iris라는 미망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미모에 끌린 어느 화가가 간절히 청혼을 하였다. 그녀는 실제와 똑같은 그림을 그리면 들어주겠노라고 하였다. 화가는 전심전력상상의 꽃을 그려 사랑의 표시로 바쳤다. 그러나 실제와 다를 뿐만아니라 향기가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때 마침 나비 한 마리가 그림으로 날아와, 마침내 승낙하여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녀가 죽은 후 그림을 함께 묻었는데, 무덤에서 ‘상상의 꽃 붓꽃’이 피어났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꽃말은 기쁜 소식․심부름인데, 선녀가 무지개를 타고 기쁜 소식을 전하러 땅에 심부름 왔으나 구름이 무지개를 걷어버리자, 꽃창포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어느 날 프랑스 클로비스왕이 꿈을 꾸었다. 꽃창포가 수 놓아진 방패를 왕비에게 전해달라고 말이다. 이에 왕은 전국 병사의 방패를 꽃창포 모양으로 바꾸어 적군의 침입을 막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이리스가 프랑스의 국화가 되었다는 것. 이렇게 이야기만 들어도 창포의 아름다움이 상상되지 않은가? 아닌게아니라 방문자센터에서 바라보는 공원은 온통 창포꽃 만으로도 화려함의 극치다. 세계 4대 꽃 중의 하나라는데, 130종 30만 본을 15,000㎡에 심었다니까 그 규모를 짐작할만하지.
입구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향하면 자생붓꽃원을 지나 전망대가 있다. 계단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니 그야말로 형형색색 창포들의 축제요, 사진가들의 경연장이다. 넓은잎목원 앞에서 지그자그 나무데크 다리를 건너면, 습지원의 여러 가지 수생식물․수변식물을 만나게 된다. 습지형붓꽃원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보다가 책읽는 언덕에서 잠깐 쉬었다. 간식을 먹는데 꽃의 취기에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새삼스레 조물주의 창조의 신비에 감탄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곁부축한 노약자들이 유달리 많은 걸로 보아 편안하고 정겨운 공원임에 틀림없다.
아치형 다리를 건너 왼쪽 약용식물원으로. 한약을 지어 약탕관에 다리는 조형물 앞에 서니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한약방을 하셨기 때문이다. 천정에 조롱박이나 수세미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약봉지, 약장에 한자로 빼곡히 씌어진 약 이름, 그리고 항상 집안 전체가 한약 냄새가 배어있었지. 쌍화탕식물원․십전대보탕식물원․가정질병식물원․강정강장자원식물원․아로마테라피식물원․항암자원식물원....70종 13만 본이 심어져, 국내에서 생산되는 약용식물 대부분이 한 자리에 있다고 한다. 귀에 익은 식물 이름인지라 정답고, 나뭇가지와 이파리 하나 하나에서 한약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징검다리를 건너 억새원을 지나고, 산림생태관 앞 늘푸름원에 접어들었다. 우거진 큰 나무 그늘 아래로 한가하게 산책하는 연로한 사람들, 특히 손목을 맞잡고 걸어가는 노부부 모두들 창포꽃마냥 아름다웠다. 오물오물 씹고 있는 게 껌이 아닌 약방 감초일지도 모른다. 달콤한 마음의 감초(甘草) 말이다.
숲쉼터에서 앉아 파아란 잔디마당을 바라보면서, 수첩 가득히 적은 꽃과 나무들을 읽어보았다. 그림이나 사진이 없을 뿐 식물도감이다. 수목․관목․초화, 창포만 해도 꽃창포․노랑창포․부채붓꽃․타래붓꽃․꽃범부채....여기에서도 창포와 붓꽃을 함께 묶어 창포원으로 부르고 있다. 삼지구엽초․금마타리․독줄무늬난․관중․끈끈이주걱․서울오가피가 서울시 보호 식물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허허벌판의 비닐하우스촌이었는데, 2009년 서울시가 유일하게 공식 생태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자연과 함께 숨 쉬는 생명의 숲이요, 빌딩 숲 속의 꽃창포 파라다이스가 틀림없다. 다만 도심에서 너무 거리가 멀고, 의젓하게 버티고 있는 명산 도봉산의 강한 자력 때문에 많은 등산객이 그리로 끌려가는 것 같다. 그러나 신과 왕 그리고 화가도 반한 창포의 매력에 한번 빠지면, 아마 어느 누구도 눈이 멀어 허우적거릴 것이다. 누군가가 그토록 좋은 곳이냐고 물어보면, 그저 ‘와서 보라!’는 말 한 마디 밖에 다른 말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