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새가 깐 알
일본 사람들이 물러간 후 거리에는 태극기가 물결쳤다. 해만 덩그렇게 그려진 일장기보다는 더욱 멋있어 보였다. 그러나 태극 모양이나 색깔도 가지각색이고, 괘도 네 개 짜리 여덟 개 짜리 그 위치마저 갖가지였다. 누구 한 사람도 어떤 것이 바르다고 장담한 사람은 없었다. 이 태극기를 그려서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며 쏘다녔다.
“조선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어떤 사람은 우리 나라가 ‘조선’이라 했으며, 다른 사람은 ‘대한’이라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대동진’이라고도 했다. 과연 우리 나라의 이름은 뭐가 맞는다는 말인가?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름의 단체들이 비온 뒤의 죽순처럼 생겨 나와서, 갖가지 깃발을 흔들며 행진을 했다. 일본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며 붙어살던 사람들도, 다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한다고 외쳤다. 그 가운데는 왜놈들의 묵은 때를 벗겨 내고,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 낸다는 핑계로, 일본 집에 들어가 살림을 훔쳐서 빼돌리는가 하면, 아예 못을 빼고 들어가 자기 집으로 차지해 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하세가와 집 정원에 금괴가 묻혔디야.”
“가또 집 벽 속에 보석을 곰췄디야.”
별별 소문이 나돌자, 정원이 파헤쳐지고 벽이 헐렸다. 다다미가 걷혀지고 온돌방이 들어서며, 연통이 세워져 집이 시커멓게 그을려졌다. 궁궐 같던 집들이 오막살이처럼 헐기 시작하고, 그 아기자기하게 아름답던 정원들은 파헤쳐져 모조리 텃밭으로 변해 버렸다. 폐허로 변해 버린 남산과 함께, 이 작은 고을은 마치 홍수가 할퀴고 지나간 마을의 모습과도 같이 쓸쓸해졌다.
학교에서는 되찾은 우리 한글을 배웠다.
“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그 기
나 냐 너 녀 노 뇨 누 뉴 느 니
.................................................................”
마치 외국 글자를 배운 것 같이 서툴렀다. ‘가메 거무 괴기 구두 군지 기차’ 가 ‘가마 거미 고기 구두 그네 기차’의 사투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표준말로 배워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꽹매 꽹매 꽹매 괭, 꽤갱 꽤개개 꽹매꽹”
추석 때부터 풍물놀이 패들이 거리에 나타났다. 울긋불긋한 띠를 두르고 고깔모자를 쓴 어른들이, 꽹과리 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북과 소고와 장구와 징을 치며 춤도 추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커다란 깃발을 앞세우고 거리를 누볐다.
“ 얼시구 좋다! 지화자 좋다!”
상점 앞에서, 농가 안 마당에서 한 바탕 놀고 나면 막걸리가 나오고, 거나하게 취한 놀이 패들은 더욱 신명나게 두드리며 춤을 추었다. 허가 없이 담근 밀주가 버젓이 나돌아도 단속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어깨 위에서 무동이 춤을 추면 탈을 쓴 춤꾼들이 한데 어울리고, 마침내는 구경꾼들도 어깨를 들썩거리고 궁둥이를 흔들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풍물패들은 술에 취하고, 구경꾼들은 흥에 취하여, 늙은이 젊은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었다.
“ 어, 취한다 취해. 죽은 죽어도 못 묵고 밥은 바빠서 못 묵고, 술은 술술 잘 내려간다.....”
마치 숭늉 마시듯이, 몇 사발씩 꿀꺽꿀꺽 마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막걸리가 수염을 타고 흘러내려 뚝뚝 떨어진 사람도 있었다.
비둘기들도 해방의 기쁨을 아는 것일까? 풍물놀이 패들의 요란한 꽹과리 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함께 하늘을 날며 춤을 추었다. 읍사무소 지붕 위에서 무리 지어 사는 비둘기, 학교 지붕 틈새에 둥지를 틀고 사는 비둘기들이 한 떼를 지어 한 바탕 춤을 추다가, 정길이네 ‘8.15양복점’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 어이, 자네들도 한 잔 하게....”
잠시 숨을 돌리며 풍물놀이를 구경하더니, 그들도 취한 듯이 다시 춤을 추며 날아다녔다. 재호는 어렸을 적에 바다 위에서 춤추며 날아다니던 갈매기와 왜가리가 문득 생각났다.
“삐둘기가 영물이라 더니, 8월 15일 해방된 걸 아는가보네 잉.”
“금매 말이시, 해필 8.15 양복점 지붕에만......”
누군가 이런 말을 하면서 비둘기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재호는 이 놀이 패들을 온종일 따라다니다시피 하였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시끄러웠으나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해가 지는지 달이 뜨는지 모르게 따라다녔다.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도 꽹과리 소리가 귀에 쟁쟁해서, 이불 속에서 몸을 움쭉움쭉 했다.
“꽹매꽹매 꽹매꽹 꽤겡꽤겡 꽹매꽹.....”
‘ 해방이란 게 좋구나. 독립이란 게 좋긴 좋구나!’
노상 일본 군가나 부르며, 근로 보국이니 방공 훈련이니 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이렇게 자유와 평화를 누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이 아니고 무엇인가?
“ 달아 달아 볽은 달아, 강강술래.
이태백이 노던 달아, 강강술래.
저그 저그 저 달 속에, 강강술래.
계수나무 박혔으니......”
그 해 추석날 밤 재호네 학교 운동장에서 펼쳐진 강강술래는 또 하나의 볼만한 축제였다. 목청 좋은 소리꾼이 메기는 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강술래’하며 받는 소리를 하였다. 처음에는 진야조의 느린 가락으로 부르다가, 중모리 중중모리로 차츰 빨라져서 마지막에는 자진모리로 빠르게 불렀다.
낭자에 비녀를 꽂은 아낙네, 땋아내린 머리끝에 빨간 댕기를 드린 큰아기, 단발을 한 계집아이들......아주까리 기름을 반지르르하게 바른 검정 머리들이, 밝은 달빛에 더욱 번쩍거렸다. 오랜만에 몸빼 바지를 벗어던지고, 치마를 입은 사람이라면 빠짐없이 모여들어, 손에 손을 마주 잡고 그림자와 함께 뛰노는 모습들은, 마치 신들린 무당들 같았다. 춤이라 할 것도 없이, 그저 걷다가 뛰다가 하는 단순한 동작의 되풀이인데도 그토록 신날까?
뛰다가 숨이 차서 손 고리가 끊어지면, 그런대로 작은 고리가 만들어지면서 또 뛰고, 구경하던 사내들이 짓궂게 발을 걸어 넘어지면 주줄이 쓰러지다 다시 일어나 또 다른 원을 만들고....... 옷고름이 풀려 젖가슴이 드러나고, 치마끈이 풀려 고쟁이가 드러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휘영청 밝은 달 아래서 밤이 맟도록 펼쳐진 강강술래는 지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재호는 두둥실 떠오르는 달덩이가 그토록 크고 둥근 것인지, 그리고 중천에 걸려있는 달덩이가 그렇게 밝고 아름다운지 이전엔 미쳐 몰랐다. 계수나무 아래서 떡 절구를 찧는 옥토끼가 보이는 듯 마는 듯, 달은 신비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밤새도록 이들을 지켜주었다. 36년간 짓밟히고 억눌렸던 설움이 그렇게 폭발한 것일까? 그 후에 안 사실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우리 수군들의 사기를 북돋고, 왜군의 기를 꺾기 위해서 아낙네들이 그렇게 강강술래를 했다는 것이다.
때마침 몇 년만에 풍년이 들어, 이런 축제는 동지를 지나 이듬해 설, 대보름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공출이다 배급이다 야미다....하여 꽁꽁 얼어붙었던 인심이 새 봄과 함께 풀리면서, 나누어 먹고 바꾸어 먹고 참으로 넉넉하고 푸짐했다. 그리고 미신이라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서 모름지기 금지 당하고, 비상 시국이라는 이유로 잠잠해졌던 고싸움, 줄다리기, 다리 밟기, 쥐불놀이 등 가지가지 민속놀이들이 되살아나서 축제의 마당이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일본 마츠리 축제보다 훨씬 더 신났다.
1)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농업,농민이 세상에서 가장 근본임
2) 몸빼...왜정 때 여자들이 입었던 바지 종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