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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리요

종이새가 깐 알

by 최연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2층에서 공부하던 상급생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오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방공 연습 때 대피 훈련을 해도 그토록 쿵쿵거리지 않았는데, 낡은 나무 계단이 금방 무너질 것 같았다. 복도 창문을 열어 놓았으므로 활짝 웃는 그들의 표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야, 느그들 나와 나와! 해방된 거 몰라?”

부리나케 뛰어나간 영식이는 상급생 형들에게 참말이냐고 다그쳤다.

“그래 그래 참말이랑께. 공부하지 말고 싸게 나오란 말여!”

상급생들은 책보를 싸든 채, 계속해서 아리랑을 목청 높이 부르며 운동장으로 나갔다. 아무 선생님도 이들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조선 말 노래 아리랑을 큰 소리로 부르다니...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인데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 무서운 나가사키 선생님의 허락도 없이, 얼떨결에 상급생 틈에 끼어 한길로 나온 재호는, 삼삼오오 모여서 숙덕거리는 어른들의 모습 속에서, 무엇인가 기쁜 소식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한 더위가 채 꺾이지 않았는데, 얼굴들마다 오랜 가믐 끝에 소나기를 맞은 나뭇잎들처럼 생기가 돌았다.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다리를 건너 읍사무소 앞에 이르렀을 때 몇몇 청년들이 만세를 부르며 경찰서, 군청이 있는 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재호는 바삐 집으로 뛰어가서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마에다네에 가고 없었다.

“엄니, 이리 나와 봐요!”

“시끄러, 조용해!”

어머니는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마에다의 슬픈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 해맑던 웃음을 잃은 마에다는, 아무 말 없이 어머니더러 어서 가보라고 손짓만 했다.

“엄니, 해방이 멋이라우?”

“나도 몰겄다.”

“독립은 또 멋이다요?”

“금매, 나도 모른당께. 아무 말 마...”

한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립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도 조선말을 마음대로 쓰는 것이 참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 날 밤 어머니는

“재호야, 이제 니 아부지가 올랑갑다.”

“엄니, 핀지 왔어라우?”

“안 죽었으믄 올티지.”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팽그르르 괴었다. 돈 벌러 간다던 아버지가 사실은 일본에게 강제로 끌려갔다고 했다. 일본 큐우슈의 어느 탄광에서 죽도록 일을 했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병들어 죽지만 않았으면, 이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이다. 재호의 눈앞에는 벌써 아버지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아부지가 온담서 엄니는 무담시 울어요?”

“넌 니 에미 속 맘 당아 몰라....”

어머니의 속마음이란 무엇일까? 또 새 장가 들었다는 것일까? 왜 어머니가 있는데 새 장가를 간다는 말일까? 재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날 밤 어머니는 우리 나라는 일본이 아니고, 조선이라고 했다. 그런데 힘이 없어, 일본이 우리 조선을 합쳐서 다스리게 되었다고 했다. 일본하고 미국하고 전쟁을 했는데, 아마도 일본이 진 모양이라고 했다. 그 이상은 더 모른다고 했다.

‘ 일본이 졌다니 왜 졌을까? ’

이것 역시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이튿날 학교에 갔으나 아이들만 웅성웅성할 뿐 나가사키 선생이 보이질 않았다. 영식이가 교단에 올라서더니,

“야들아 봐, 내 말이 맞지? 이태리도 지고 독일도 지고 이제 일본도 항복했단 말이여.”

아이들은 영식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영식이는 어떻게 그런 소식을 속속들이 잘도 알까? 영식이는 점쟁인가? 예언자인가? 선생님도 모르는 이야기를 다 알고 있으니......이미 영식이는 선생의 선생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영식이는 요즘 부쩍 여드름이 나고, 코밑에는 제법 수염이 까뭇까뭇해졌으며, 목소리도 한결 굵어졌다. 자기는 열 다섯 살인데 출생 신고를 늦추는 바람에, 호적에는 열 세 살로 되어 있다고 하면서, 급우들에게는 입버릇처럼 젖비린내가 난다는 둥, 귀뿌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노상 상급생들하고 사귀며, 같은 학급 친구들을 동생 취급했던가 보다.

정면 벽에 걸렸던 ‘이중교’ 액자가 간데 온데 없이 사라지고, 항상 게양대 위에서 펄럭거리던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다. 월요일 1교시 ‘수신’ 시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외우던 ‘황국신민의 맹세’ 도 없어졌다. 물론 일본의 국가도 부르지 않았다. 일본 선생님들은 보이지 않고 조선 선생님들만 이 교실 저 교실 옮겨 다니면서 수업을 했다.

“ 최 재호!”

“ 하이!”

“ 김 종배!”

“..............”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야마구찌 사이꼬’가 ‘최재호’로 바뀌고, ‘가네무라 쇼바이’가 ‘김종배’로 너무 갑작스럽게 바뀐 것이 어색해서, 아이들은 남의 이름 부른 것 같이 물끄러미 있거나, 곧잘 일본말로 대답하곤 해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선생님은 우리말과 우리 글을 되찾았으니 왜놈 말은 절대로 쓰지 말라고 했다. 국어인 일본말만 쓰고 조선말은 절대로 쓰지 말라던 때가 바로 엊그제인데, 세상이 이렇게 바뀔 수 있을까?

연세가 지긋한 이 선생님이 오셔서 우리 나라의 역사를 대강 가르쳐 주었다. 우리 나라는 ‘대한제국’이었는데,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제로 합병하였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서 미국과 싸우다가 원자탄에 얻어맞고, 지난 8월 15일 항복을 했다. 그래서 우리 나라는 36년만에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는데, 이제 식민지가 아니고 독립된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센세이, 누가 항복을 했답니까?”

“센세이가 아니고 선생님이여.”

“아 참 선생, 누가 항복했다요?”

“히로히또 천황이 미국한테 했제.”

“그라믄 조선 땅에 사는 일본 사람들은 으츠꾸 된답니까?”

“그야 제 나라로 돌아가야지야.”

살아있는 신 천황이, 귀축 미국에 항복을 했다니....이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사실 앞에, 아이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었다. 일본 선생들이 조선 선생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소문도 나고,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나가사키 선생은 상급생들에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도망쳤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가사키 선생의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세상이 뒤집혔다.



1) 이중교(二重橋)...일본 궁전 앞의 다리

2) 수신(修身)...몸과 맘을 닦음(우리 나라의 도덕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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