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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부러진 매

종이새가 깐 알

by 최연수

국방 헌금을 내라고 하였다. 금은 비녀, 금은 가락지 같은 귀금속을 바치라고 하더니, 심지어는 축음기 바늘, 구두 주걱, 세수 대야 같은 쇠붙이도 바치라고 했다. 군수품 공장으로 보내진다는 것이다.

뜻밖에 할아버지가 오셨다. 오랜만이라 재호는 무척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 불안하기도 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어머니와 곧잘 말다툼을 했기 때문이다.

“거 놋그럭 다 바쳐부렀냐?”

“안 바치믄 압수하겄다고 했어라우.”

“그렁게, 바쳤어 안 바쳤어?”

“당아 안 바쳤는디요”

“어여 이리 내놔라.”

할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오가는 말소리가 매끄럽지 않아서, 또 무슨 일이나 벌어지지 않을까 재호는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놋그릇은 제사 때만 꺼내어 쓰는 귀한 제기가 아닌가? 그러나 어머니는 제사 때마다 놋그릇 닦다가 몸살을 앓곤 하였다. 기왓장 조각을 깨뜨려 가루로 빻고, 이것을 짚에 묻혀 온 힘을 주어 닦아야 황금색 빛이 났다. 이런 기회에 차라리 없어지면, 놋그릇 닦는 그 힘든 일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어머니는 은근히 압수해가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놋그릇을 꺼내어 온 어머니의 얼굴이 몹시 언짢아 하는 빛이었다.

“ 상가 집에 빈소도 못 차리게 하더니, 이제 제기까지 몰수해서 제사조차 폐지할라는 수작이여. 천하에 몹쓸 놈들! 지 나라 귀신한테는 지사 지내라 하고...”

할아버지는 가래침을 퇴 뱉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셨다. 증조부모와 할머니의 위패와 놋그릇과 할아버지의 옷가지를 괴나리 보따리에 챙겨 넣으며,

“재호 너 증조부모, 함마니 지사 때는 꼭 와야한다. 지삿날은 알지 야?”

“ 예 ”

“ 니 함마니 지삿날은 언제여? ”

“ 2월 그믐날이어라우. 증조부님은 5월 초닷새 단옷날, 증조모님은 8월 보름 추석이고.”

제삿날은 다행히 명절과 겹쳐, 외우기 쉬운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 넌 우리 집 종손이여....”

이 말만 재호에게 남겨 놓고 훌쩍 되돌아가셨다. 작은댁으로 가셨던 그 때의 노여움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 했다. 이번에는 고모집으로 가셨을 것이다. 야미쌀을 단속하느라고 눈알이 벌겋게 되어있는 판에, 놋그릇을 감추고 삼십 리 길을 어떻게 무사하게 걸어갈 수 있을까? 탕건이 한층 괴팍스럽고 초췌하게 보였다.

학교 수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운동장은 온통 채소밭으로 일구고, 교사는 생 나뭇가지로 위장을 했다. 이제 방공 훈련은 날마다 하였으며, 고학년은 총검술 훈련까지 익혔다.

흰옷은 염색해서 입게 하였고, 가슴에는 어른 손바닥만한 이름표를 달았다. 주소와 부모님 성명 심지어는 혈액형까지 써넣었다. 출혈하면 수혈하기 위함이다. 어깨에는 적십자 가방을 메었는데, 그 안에는 비상 식량인 미싯가루와 소금 그리고 붕대와 몇 가지 구급약을 넣도록 했다.

“ 일억 옥쇄를 각오해야 한다! ”

나가사키 선생의 눈초리가 칼날같이 번뜩이었다. 아이들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의 그림을 그려놓고, 칼로 찌르고

그 눈을 바늘로 쑤시며 적개심을 길렀다.

“ 미.영 놈들이 상륙하면 너희들은 다 엮어서, 길가에 눕혀 놓고 탱크로 밀어 버린다.”

“ 음! ”

선생님의 말에 누군가 신음 소리를 냈다.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올라갔다. 그런 귀축같은 야만인들이 지구 위에 살고 있다니...

들에서 보리 베기 근로 봉사를 하면서 꿩 사냥 이야기가 나왔다. 시계포를 하는 스모가와상은 포인타 개 한 마리와 보라매 한 마리를 데리고 가끔 사냥을 나갔는데, 하루는 포인타가 꿩을 문다는것이 매를 잘 못 물어 한 쪽 날개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제중의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제대로 날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매는 길들인지 1년이면 갈지개, 2년이면 초진이, 3년이면 삼진이라고 하는데 스모가와의 보라매는 초진이란 것이다.

“에엥 에엥 에엥.....”

또 경계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밭두둑, 밭고랑에 엎드리면서도 이제는 이골이 나서 영식이가

“소리개 떴다. 삥아리 곰춰라!”

하고 빈정거리는 소리로 크게 외쳤다. 아이들은 킥킥거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닌게아니라 소리개 한 마리가 떠서 빙빙 돌고 있을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들쥐라도 발견했을 것이다.

내지에 공습이 있을 때는 물론, 도오쿄나 나고야, 고오베에 적기가 나타나기만 해도 조선 땅에서조차 이렇게 자주 경보가 발령되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멀 할까?”

“가미카제? B29 앞에선 날개도 못 핀디야.”

“그라믄 날개 뿐지러진 매게?”

“맞어, 꿩 잡는 게 매 아녀? 꿩도 못 잡는 매가 매겄냐?”

그렇다. 이빨 빠진 호랑이는 종이 호랑이요, 날개 부러진 비행기도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에 지나지 않는다.

해제 경보가 울리자, 옷을 떨며 일어난 영식이가 주위를 살피더니

“이태리는 무찔러 쥑였고, 독일은 비틀어 쥑였디야. 다음엔....”

하고 끝도 갓도 없는 말을 던졌다. 그의 말은 늘 길 깊은 물 속 같아서 얼른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태리의 뭇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를 빗대어 한 말이란 것을 한참 만에야 알아차린 아이들은, 웃음은커녕 너무 놀라와 말조차 잃어버렸다.

‘ 영식이는 스파일거다! ’

천황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천조대신께 일본의 승리를 빌어야 할 처지인데, 왜 영식이는 일본을 빈정거리는 말투를 가끔 하는 것일까? 아이들은 그토록 따르던 영식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튿날, 영식이가 귓불을 붙잡힌 채 교무실로 끌려갔다. 헛소문을 퍼뜨린다고 호된 벌을 섰다. ‘황국신민의 맹세’를 백 번이나 외우고, 만약 다시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면 퇴학처분 한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 나왔다. 교실로 돌아온 영식이는 분함을 이기지 못 한 채 누가 고자질했느냐고 코를 식식거렸다. 기어코 밝혀 내고야 말겠다며 벼르는데, 미야자와 시게루인 윤석이와, 마에다네와 기꾸장네를 드나드는 재호에게 눈길을 모았다. 그러나 천황폐하 훈장까지 받았다는 윤석이에게는 감히 따지지 못하고, 재호만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미움이 이글이글 일고 있었다. 재호는 마치 자기가 죄인이나 된 것처럼, 몸을 움츠리며 애써 외면을 했다.

“재호, 니가 틀림 없어!”

“아녀, 내가 안 했당께. 그러네.”

“이 개자석, 거짓말 마!”

“무담시 그러네......”

재호의 떨리는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영식이의 넓적한 손바닥이 번개 같이 날아와, 재호의 귀싸대기를 후려갈겼다. 눈앞에 불똥이 튕기며 코가 얼얼하더니, 새빨간 피가 주루루 흘러내렸다. 너

무 억울했으나 변명할 말을 찾지 못 했다. 모두들 윤석이를 의심했으면서도, 이를 지켜보며 맞장구를 치는 아이들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재호는 우물가로 나가 저고리의 피 얼룩을 빨면서 흑흑 느껴 울었다. 교실 바닥의 핏자국들은 누군가 잽싸게 닦아 놓았다.

지금까지 형처럼 따르며 좋아했던 영식에게 그만 정이 떨어지고, 이젠 그 눈만 보아도 소름이 끼쳤다. 재호는 마에다네와 기꾸장네에 발길을 뚝 끊어야 했다. 쓸데없는 오해를 받고싶지도 않았거니와 우선 영식이의 감시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 난 바보야, 난 병신이야...’



1) 야미쌀...배급 제도 밑에서 몰래 거래했던 쌀

2) 뭇솔리니...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동맹국 이태리의 통치자

3) 히틀러...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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