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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종이새가 깐 알

by 최연수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전쟁으로 망하기 전 일본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았다. 같은 핏줄이라는 한 백성들끼리 원수가 되어,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이고 죽어야 하는지 재호는 알 수 없었다.

밤새도록 이 작은 고을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은 채, 빨치산들은 산 속으로 도망가버리고, 죽음보다 더 무서운 정적은 통곡 소리마저 빨아 들여버렸다.

“ 탕 탕 탕!”

그 날 12시 쯤. 갑자기 귀청이 터질 듯한 총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고모부는 어디론지 몸을 숨긴지 며칠 째였고, 깜짝 놀란 남은 가족들은 이 곳 저 곳으로 숨었다. 그러나 재호는 창문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 태극기!

재호는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다리 위에서 총대 끝에 태극기를 매단 사람이, 손짓으로 지휘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 야아!”

산을 진동시킬 만한 고함 소리와 함께 총 소리가 콩 볶는 듯 했다. 곧바로 대문을 박차고 들이닥친 두 사람이,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빨리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손을 든 채 나오라고 했다. 그들은 방안에, 부엌에 변소에 마구 총을 쏘아 댔다.

“ 빨리 나와!”

“ 예, 나가요”

“ 또 없어? 다 나왔어?”

“ 탕 탕 탕...”

재호와 대붕이 형제가 부들부들 떨면서 마지막으로 나왔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새파랗게 질린 채, 한길 바닥으로 나와 앉아 팔을 들고 있었다. 총부리에 대검을 한 그들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과연 누구일까? 태극기를 단 걸 보면 국군일텐데, 국군이면 왜 저토록 총을 쏘아 댈까? 아니면 국군으로 가장한 인민군일까?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주민들을 학교 마당으로 데리고 갔다. 이 곳 저 곳에 뻗어있는 시체들을 힐끔 힐끔 보면서 불안한 발걸음을 옮겼다. 소문대로 국민학교는 타 버리고, 운동장에 인민재판 때 죄인석으로 씌었다는 구령대만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이윽고 구령대에 올라간 사람이 연설을 시작했다.

“ 여러분! 공산당 치하에서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잠시 말이 끊어지자 여기저기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 우리는 대한민국 경찰입니다.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들의 과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놈의 공산당이라도 다 소탕할 때까지 우리는 싸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협조해 주어야 합니다....”

연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사람, 맨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

“ 올라믄 빨리나 오재, 워메메 원통해라......”

“ 빨갱이 놈들아, 이 오사리잡놈들아, 내 아들 살려내놔라......”

온통 운동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하룻밤 새에 죽음과 삶이 갈리는 이 난리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족들의 죽음이 원통하여 땅을 치며 숨이 넘어갈 듯이 통곡을 하였다. 석달 만에 다시 태극기를 바라보는 재호의 가슴은 기쁨에 벅차 그만 터질 것 같았다.

그 동안 소식이 없는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침에 잠깐 얼굴만 보이고 어디론지 도망간 어머니는 이 기쁜 소식을 알고나 있을까? 그리고 집을 나간 고모부는 또한 어떻게 된 것일까? 할아버지와 고모네 식구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불안과 공포에 일그러져 있었다.

경찰이 들어왔으나, 고을이 금방 평온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음 작전 지역으로 이동해 갔고, 이곳은 고장 사람들의 자치대에 맡겨졌다. 밤에는 인민공화국, 낮에는 대한민국이 며칠 동안이나 번갈아 바뀌면서, 이 틈바구니에서 또 많은 사람이 죽어 갔고, 많은 집들이 불에 탔다. 재호는 하루라도 빨리 이 아수라장을 빠져나가 장흥 집에 가고 싶었다. 벌써 아버지와 어머니가 와서 자기를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당황해 하는 고모네를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다. 아직 문밖 출입이 불안했으나 재호는 어른들의 허락도 없이 동쪽 신작로로 마구 뛰었다. 먼 산에는 붉은기가 펄럭이고 있었으며, 한길가 마을에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눈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태극기가 이다지도 소중한 것인가를 비로소 깨달았다.

‘ 아차! 내 시, 내 만화...’

서두르다 보니까 감춰 둔 시와 만화를 놓고 나왔다. 되돌아가서 가져올까 생각해 봤으나 이미 때가 늦은 것 같았다. 귀중한 재산을 잃은 듯 했으나 하는 수 없었다. 이 다음에 떳떳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 위에서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공포, 후미진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빨치산들에게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러나 재호는 30리 길을 단숨에 달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라야 단칸 방 남의 셋방이지만 그러나 문짝은 다 부서지고 살림은 모조리 박살나고...금방 도깨비라도 나올 것 같은 흉가는, 곰팡이 냄새와 냉기만 꽉 찬 채 재호를 밀어냈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 형빈아! ”

재호는 만리성 문을 두드렸다. 형빈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반기기는커녕 경계하는 눈빛으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재호를 그토록 따랐는데...

“ 형빈아. 나 재호 형이야. 엄마 없어?”

“ ..............”

형빈이 엄마가 문을 바시시 열었다.

“ 음머! 재호 아녀? 엄니 아부지는?”

“ 몰라요.”

“ 모르다니, 같이 안 왔냐?”

“ 혼자 왔어요. 소식 몰라요.”

재호는 기둥을 붙잡고 흐느꼈다. 형빈이 어머니는 갈곳 없는 재호를 맞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혀를 차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걱정했다. 형빈이네 집에서 얹혀 있은지 이틀만에 어머니도 살아서 돌아왔다. 도가머리에다 켕한 두 눈이 며칠 전의 모습과도 또 달랐다.

지난 백일 동안 바가지를 들고 다니면서, 얻어먹고 길가에서 자면서 동냥치 행세를 해 왔다는 이야기,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기막힌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소식은 까맣게 모른 채 아마도 살아 있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형빈이 어머니도 인공 시절의 몸서리나는 갖가지 이야기를 했다.

자유 중국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대신 중공의 오성홍기(五星紅旗), 자유 중국의 장개석 총통 대신 중공의 모택동 주석 사진을 갈아 단 이야기를 비롯해서, 재호네 소식을 아느냐고 은근히 어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했다는 이야기.... 가장 괴로웠던 것은 해방 후에 미군들과 친했으며, 형빈이가 양키놈 잡종이라고 갖은 모욕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좀더 안정이 되면 아무래도 형빈이를 위해서 아무도 모르는 광주로 이사가지 않으면 안 되며, 가서 화교 학교에 입학시킬 것이라는 말도 했다.

“ 뻐꾹 뻐꾹”

문득 창 너머 바라다 보이는 남산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 뻐꾸기는 피비린내 나는 6.25를 겪었을까 안 겪었을까?

‘ 영락없이 형빈이도 그 뻐꾸기처럼 울게 되겠구나’

형빈이를 바라보니 엄마 아빠도 모르는 그가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다.

“ 저, 훈이 엄니 만났어라우.”

형빈이 이야기 끝에 재호는 왜 훈이가 생각났을까?

“ 어데서?”

“ 고모네 집 가다가 군동 길가에서요.”

“ 그래서?”

“ 만리성 아주머니 잘 계시냐고 묻던데요.”

“..............”

형빈이 엄마는 재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 애기 잘 크냐고 해서요, 형빈이가 지금은 뛰어다니고 말도 잘 한다고 했어요.”

“ 그래서?”

“ 그랬더니 눈물이 글썽거리던데요.”

어머니와 형빈이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주보고 입술만 들먹거리며 말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 누구 이야기야?”

“ 아아니, 훈이 엄마가 너 잘 크냐고 했다 해서....”

“ 훈이 엄마가 누군디?”

“ 이웃집 아짐만디 멀리 이사갔어.”

“ 훈이 엄마가 나 알아? ”

“ 애기 때 봤으니께 알지.”

형빈이는, 훈이가 누구며, 어디로 이사갔으며, 왜 이사갔냐는 등 재호가 봐도 지나치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이 때 밖에서 우렁찬 노래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열어놓은 창가로 쪼르르 나간 형빈이도 따라 불렀다. 아직도 인공 시절의 노래가 불리어지고 있음에 소스라치게 놀란 재호는, 창 너머로 위장을 하고 행진하는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재호는 이것이 대한민국 국군들이 즐겨 부르는 ‘전우야 잘 자라’란 군가였음을 한참 만에야 알았다.

장흥읍은 겉보기에는 6.25 전과 다름없이 평온하게 보였다. 태극기가 펄럭거리고, 불탄 집도 눈에 띄지 않으며, 곡성이 들려오거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영식이는 작은 형님과 함께 인민공화국 시절 대단한 빨치산의 앞잡이였다고 했다. 그리고 빨치산들에게 붙잡혀 총살형장으로 끌려가다가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원준이가, 지금은 경찰에 지원하여 로케트포를 어깨에 메고 빨치산 토벌 작전에 앞장서고 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학교 때도 재호와 함께 우익이라고 따돌림받고, 중학교 때도 전국학련에 가입했다고 얻어맞았던 그가 아닌가? 마침내 복수에 나섰을 것이라고 짐작해 보았다.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까지도 이러했다면, 내용적으로는 장흥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전진한다”

이 때 밖에서 우렁찬 노래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열어놓은 창가로 쪼르르 나간 형빈이도 따라 불렀다. 아직도 인공 시절의 노래가 불리어지고 있음에 소스라치게 놀란 재호는, 창 너머로 위장을 하고 행진하는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재호는 이것이 대한민국 국군들이 즐겨 부르는 ‘전우야 잘 자라’란 군가였음을 한참 만에야 알았다.

장흥읍은 겉보기에는 6.25 전과 다름없이 평온하게 보였다. 태극기가 펄럭거리고, 불탄 집도 눈에 띄지 않으며, 곡성이 들려오거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영식이는 작은 형님과 함께 인민공화국 시절 대단한 빨치산의 앞잡이였다고 했다. 그리고 빨치산들에게 붙잡혀 총살형장으로 끌려가다가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원준이가, 지금은 경찰에 지원하여 로케트포를 어깨에 메고 빨치산 토벌 작전에 앞장서고 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학교 때도 재호와 함께 우익이라고 따돌림받고, 중학교 때도 전국학련에 가입했다고 얻어맞았던 그가 아닌가? 마침내 복수에 나섰을 것이라고 짐작해 보았다.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까지도 이러했다면, 내용적으로는 장흥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1)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중화민국(자우 중국)의 국기

2) 장개석 (蔣介石)...중화민국 총통

3) 오성홍기(五星紅旗)...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국기

4) 모택동 (毛澤東)...중화인민공화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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