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권하지 않는 사회를 위하여
우리는 왜 늘 술잔 앞에서 진심을 꺼내야만 할까.
감정을 나누는 자리에 술이 빠지면, 어딘가 어색해지는 사회.
한국에서 ‘사회생활’이라는 말엔, 어김없이 ‘술자리’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나는 요즘 생각한다.
정말 술이 아니면,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걸까.
술을 못 마시면 뒤처진 사람처럼 느껴지고, 회식이 두려운 이유는 사람보다 '술' 때문일 때가 많다.
예전에 회식자리에 앉아 있으면, 어느 팀이 술을 더 잘 마시나를 두고 은근한 경쟁이 붙곤 했다. 한쪽 팀이 이기면 그 팀은 과장님이 좋아하는 팀이 되고, 진 팀은 어딘가 미운털이 박힌 팀처럼 취급되었다. 1차, 2차, 3차, 4차까지 남아 있는 팀이 ‘최종 승리자’로 불렸고,
그 사이 중간에 빠지거나 귀가하는 사람은 분위기를 깨는 사람, 사회에 적응 못 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나는 그런 풍경이 늘 씁쓸했다. ‘즐거움’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의 체력과 인내심을 시험하는 문화.
누가 더 술이 세고,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가 팀워크의 척도가 되는 현실이 어딘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이 사회는 이미 너무 경쟁적이다. 회사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술이 관계의 도구가 되고, 술잔을 비우는 속도가 팀워크의 기준이 되어버린 사회.
건배사를 누가 더 잘하느냐도 경쟁이 되었다.
신박하고 기발한 건배사를 하면 박수가 터졌고, “파이팅!”처럼 단순하고 진부한 건배사를 외치면 분위기를 식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때마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건배사를 할 차례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고기를 씹으면서도 입 안에서는 건배사를 굴리고 있었다. 웃음을 지으면서도 머릿속은 이미 “이번엔 뭘로 터뜨려야 하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결국 회식은 ‘즐거움’보다는 ‘경연’에 가까웠다.
누가 더 유쾌한 사람인지, 누가 더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인지,
누가 더 센스 있고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인지, 그것을 술잔 위에서 증명해야 하는 자리.
회식이 끝나면 고기의 여운보다 떠들썩한 에너지의 잔향이 더 오래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이상하게도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간 듯한 허탈함만 남았다.
어쩌면 우리는 일보다 ‘관계’에 더 많이 기웃거리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만나며 진이 빠지고, 회식은 즐거움보다 부담이 앞설 때가 많다.
업무의 연장선이기도 하지만, 감정의 연장선 같은 자리.
그 안에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를 견주곤 한다.
누가 분위기를 더 살리고, 누가 더 오래 자리 지키고, 누가 더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는가를.
하지만 문득 생각한다.
술을 잘 마시는지, 건배사가 재미있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그저 사람들과 편하게 어울리고 싶은 마음조차 때론 시험처럼 느껴지곤 한다.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함께 먹는 자리’가 ‘서로를 시험하는 자리’가 되어버렸을까.'
사람들은 술을 직장생활의 ‘윤활유’라고 말한다.
맞다, 술잔 앞에서는 회사에서 쉽게 하지 못하는 말을 나눌 수 있는 자리니까...
하지만 그 윤활유, 가끔은 마음의 벽을 더 미끄럽게 만든다.
진심이 아니라 술김이 먼저 흘러서 오히려 서로의 거리를 더 미끄러뜨려 버린다.
말은 가까워지는데, 마음은 멀어진다.
그게 이 사회의 술자리다.
술자리에서는 술의 기운을 빌려 과한 행동과 과한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기도 한다.
그 속에서 나는 더 불편했고 그런 말들은 오히려 진심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세상을 탓할 수도 없다.
술 권하는 사회를 만든 사람도, 그 속에서 살아온 나도, 누구도 온전히 잘못이라 할 수 없다.
그저, 우리는 조금씩 지쳐 있을 뿐이다.
술 권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더 중요하게 봐야 하는 건,
술잔의 높이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 '아닐까.
나는 이제 술 대신 마음으로 건배하고 싶다.
술잔이 아닌 눈빛으로,
비유가 아닌 진심으로,
우리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술을 강요하지 않아도, 건배사를 외치지 않아도,
충분히 즐겁고 따뜻한 관계가 가능한 세상.
그렇게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사회라면 조금이나마 덜 피곤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건배사는 여기까지.
나는 오늘도 맑은 정신으로 사람을 믿는다.
[엔딩 크레딧]
( 자막 제공 : 술은 줄었지만, 진심은 도수 높게 남았다.)
( 협찬: 상사 눈치 + 잔반처럼 남겨진 회사 생활의 후유증)
(장소 제공 : 회식 2차로 밀려가는 길에, 잠깐 스쳐 지나간 맑은 정신 한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