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늘 사소한 냄새에서 시작된다.
특정 음식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에겐 된장찌개는 엄마를, 김치찌개는 아빠를...
나에게는 ‘참기름’이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라면과 참기름의 조합은 ‘할머니’를 불러오는 신호가 되었다.
어릴 적,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초가슈퍼’를 하셨다.
과자, 아이스크림, 음료수...
작은 공간 가득 세상이 쌓여 있어 설레는 장소였지만 나는 늘 서운했다.
할머니는 내가 고른 과자를 하나하나 검사하셨다. 비싼 건 안 되고, 싼 것도 허락받아야 먹을 수 있었다.
‘손주한테 과자 하나도 아끼나...’
어린 마음엔 정이 없다고만 느껴졌다.
그 마음의 배경을 알게 된 건 훨씬 뒤였다. 할아버지가 하시던 두부 공장이 망하고, 여섯 남매를 키우기 위해 할머니가 콩나물 장사를 하며 버텨온 시절이 있었다는 것.
그 검소함은 가난의 흔적이 아니라, 길고 고단한 시간을 버텨낸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몸에 새겨지는 생존의 태도였다는 것을였다는 것을 할머니가 떠난 후에야 알았다.
세월이 흘러 슈퍼를 접으신 뒤, 할머니댁에 놀러 가면 가끔 라면을 끓여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꼭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리셨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향이 왜 필요한지, 왜 굳이 라면 맛을 바꿀 만큼 넣으시는지.
진한 향이 싫다며 빼달라고 하기도 했다. 정말 철없던 시절이었다. 할머니가 떠난 뒤에서야, 그 참기름 한 방울에 담겨 있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참기름 한 방울은 과자보다 비싼 선물이었음을. 할머니가 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풍성함,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것을 나에게 쥐여주던 사랑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참기름 한 방울은 그냥 음식이 아니라, 할머니가 나에게 건네던 사랑 그 자체였다.
나는 한때 무뚝뚝한 손녀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잠시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셨지만, 나는 그 마음에 보답해드리지 못했다.
같이 자자고 하면 “공부해야 해서요..” 하고 피해 다니고, 목욕탕 가자면 “친구 만나야 해서요..” 하고 슬쩍 빠졌다. (그 친구들은 그 약속의 존재조차 모르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내 생일 때마다, 만 원짜리와 천 원짜리 몇 장을 들고 동네 빵집으로 가셔서 손수 비싼 케이크를 사 오셨다.
돌아보면 정 없는 건 할머니가 아니라 나였다.
철없고, 바빴고, 서툴렀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할머니를 생각하면 후회가 밀려왔다.
그 마음을 돌려드릴 시간이 이제는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
문득 할머니가 그리운 날이면 참깨라면을 먹는다.
참기름 뚜껑을 여는 순간, 가슴속 온도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참기름 향 하나가 할머니를 데려온다.
짧게, 따뜻하게, 아릿하게.
참깨라면 안에는 할머니의 냄새, 잔소리,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나를 이해해 주던 시간이 보이지 않게 스며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후회하지 말자.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아끼지 말자.
할머니께 못 전했던 마음은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흘려보내자.
할머니가 참기름 한 방울로 보여줬던 것처럼.
하나의 서운함 때문에 열 개의 좋은 기억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되자.
참기름 한 방울이 그러했듯, 작은 마음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덮어줄 수 있으니까.
오늘도 그 한 방울이 내 마음을 살짝 덮기를 바란다.
그러면 나는 조금은 덜 힘든 사람이 될 테니까.
독자 여러분의 하루에 그 한 방울의 위로가 부드럽게 스며들기를 바라며.
[엔딩 크레딧]
(감독: 라면 위에 사랑을 한 방울 더하던 분, 할머니)
(각본: 뒤늦게 철든 손녀, 나)
(제작: 초가슈퍼와 참기름 냄새)
(특수효과: 라면 김 모락모락 + 참기름 톡!)
(장소 협찬: 작은 부엌 한쪽, 오래된 냄비, 그리고 할머니의 마음)
(자막 제공: 서운함은 잠시 보관, 따뜻함은 바로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