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날로그의 기쁨과 슬픔

아날로그 인간에서 회복하는 인간으로

by 다섯빛의 온기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창문 양옆에 붙은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12월 1일부터 현금투입구가 사라지고 카드로만 결제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마음이 묘하게 허전해졌다. 평소엔 카드를 쓰지만 가끔 카드가 없을 땐 지폐를 꺼내 투입구에 ‘딸깍’ 넣던 그 투박한 소리.
그게 참 좋았다.

하나둘 사라지는 아날로그의 자리에 디지털이 빠른 속도로 들어차는 시대. 어느샌가 공중전화는 자취를 감추고, 계산대엔 사람이 없고, 대화는 줄고, 시선은 스마트폰으로 흘러간다. 세상은 이렇게 바뀌고 있고 나 역시 따라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어딘가 서운하다. 나는 아날로그 인간이니까. 기계에 서툴고, 급하면 더 서툴어져서 실수를 하게 된다.

얼마 전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 밖에서 볼일을 보다 핸드폰 배터리가 완전히 꺼져버려 난감했던 순간이 있었다. 급히 연락해야 하는 상황에 선뜻 휴대폰을 빌려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씁쓸했다.
“공중전화라도 있었으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탈 때도 카드를 놓고 와서 현금에 기대던 날들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곧 사라진다. 아날로그적인 사람들의 설 자리가 조금씩 좁아지는 것 같았다. '어르신들은 얼마나 더 어려울까?' ‘언젠가 나도 나이가 들 텐데 이렇게 빠른

디지털 시대에 끝까지 잘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스쳤다. .


옛 조상들은 가을에 익은 감을 따다 몇 개는 가지 끝에 남겨두었다고 한다. 그것은 겨울을 버틸 작은 짐승과 새들을 위한 배려의 자리였다.

디지털 시대에도 그런 '배려의 마음'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키오스크가 늘어도 사람 있는 창구가 한 곳쯤은 남아 있고, 현금 투입구가 사라져도 부득이한 이를 위한 여지가 남아 있고, 대화를 나눌 때만큼은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는 그 작은 배려 하나쯤은 지켜지는 사회.
완전한 디지털도, 완전한 아날로그도 아닌, 서로에게 남겨두는 작은 공간. 겨울에는 가지 끝에 매달린 감처럼 누군가에게는 온기가 되는 자리.


최근 읽은 한강의 책에서 나는 이 아날로그 감성과 닿아 있는 문장들을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도 사람은 왜 굳이 빛을 찾아 나아가는가
왜 상처받고, 버티고, 다시 살아내려고 하는가..

그 질문들 속에서 나는 인간의 ‘느린 몸부림’을 보았다. 빠른 시대에 밀려 흔들리면서도 자기 속도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의지. 그 느림이야 말로사라 지지 않는 인간의 마지막 온기라는 것을.

한강의 문장들은 또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회복은 누군가 끌어다 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생존의 움직임에서 시작된다고. 밥을 먹고, 숨을 고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를 돌보는 그 사소한 행위들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첫걸음이라고..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종종 ‘사는 일’ 자체를 잊는다. 숨 쉬고, 밥 먹고, 피곤해하며 다시 눕는 반복 속에서 마음이 먼저 시들어가는 순간들을 나는 이미 충분히 경험해 왔다.

그래서 바꾸고 싶었다.

이 작은 생존의 움직임들을 단순한 루틴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점’으로.

따뜻한 음료 한 잔 들기
좋아하는 문장 하나 읽기
짧게라도 하늘을 올려다보기
주말엔 햇살이 드는 곳으로 나가 몸과 마음이 빛을 기억하도록 짧게 산책하기
10분만이라도 쓰는 일상 글쓰기
어깨춤이 저절로 쳐지는 신나는 음악 듣기
그런 사소한 동작들이 다시 살아나는
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디지털 시대 한복판에서, 아날로그 마음을 품고 '회복하는 인간'이 되려 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기계는 새벽같이 앞서 가지만 아날로그의 느림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느림이 지금의 나에게, 그리고 이 복잡한 사회에 가장 필요한 속도인지도 모른다.

공중전화 동전이 딸깍 하고 떨어지던 경쾌한 소리,
손에서 손으로 건네던 지폐의 온기,
공중전화 버튼 하나하나 누르며 애타는 마음으로 거는 전화,
서툰 손글씨로 적어 내려가던 편지들…


그 모든 아날로그의 기쁨은 한때 지나간 풍경이 아니라 여전히 나를 살게 만드는 온기였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고, 능숙하지 않아도 괜찮고, 작은 걸음이라도 진심으로 내딛는 마음..

손끝에서 시작되는 그 따뜻함이 지친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속도의 걸음을 잃지 않으려 한다. 아날로그 마음을 품고, 빛을 향해 조용히 나아가며, 그 길 위에서 조금씩, 나는 회복하는 인간이 되어간다.



[엔딩 크레딧]

(감독: 생각보다 잘 버티는 나)

(주연: 아날로그 마음)

(조연: 버스 현금투입구 마지막 세대)

(특별출연: 공중전화 동전 ‘딸깍’ 소리)

(음향효과: 종이 지폐 쾅— 하고 들어가는 착각)

(소품협찬: 오래된 편지지, 약간 삐뚤어진 손글씨)

(현장지원: 바람, 햇살, 쓰다듬듯 스치는 오후)

(미술감독: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뜻함)

keyword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