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픈 마음으로 남긴 기록
사람들은 보통 상처가 다 아문 뒤에야 그 일을 글로 옮긴다. 나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지만, 먼저 글을 쓰기로 했다. 아물기 전의 기록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지난번, 팀장님과 단둘이 출장을 다녀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분이라 차 안의 침묵이 먼저 부담이 됐다. 그런데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주제가 나왔다. 나의 아픈 손가락, 승진 이야기였다.
“자네도 이번엔 승진해야 하지 않겠나?”
“네, 저도 그러고 싶은데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도와줄 사람도 없어서 마음을 내려놨어요”라고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노력은 해야지. 후배들이 다 승진하는데 혼자 못 하면 소외감 느끼지 않을까”라는 말이 돌아왔다.
위로 같기도, 위로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무관심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물론 팀장님도 나름의 관심과 걱정으로 건넨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승진에서 밀려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내 마음에 그 말은 가슴 한편을 송곳으로 찌르는 말이었다. 게다가 ‘소외감’이라는 단어는 이미 내가 나 자신에게 수십 번쯤 되뇌었던 말이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알고 있는 사실을 남의 입으로 다시 듣는 일은 상처 위를 다시 누르는 것과 비슷했다.
팀장님의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맞받아치지 못한 나 자신이 더 마음에 남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장면을 여러 번 되감으며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지 스스로를 몰아붙였을 것이다. 그날 하루는 아마 온종일 그 생각으로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생각보다 오래 붙잡고 있지 않았다. 곰곰이 돌아보니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아직 덜 아물어 있었던 거다.
상처가 덜 아문 상태에서는
말보다 침묵이 먼저 나온다.
그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자기 보호에 가깝다.
만약 상처가 다 아물어 있었다면 “지금은 승진보다 나를 더 돌보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와 메모장에 짧게 적었다.
‘출장. 승진. 말하지 못한 말.’
예전의 나라면 키워드만 남기고 닫았을 메모다.
하지만 지금은 그 메모를 다시 꺼내 이렇게 문장으로 옮기고 있다.
문득 내 브런치북의 첫 제목이 떠올랐다.
〈뒤처진 자리에도 레드카펫은 깔린다〉
그 문장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붙잡아 두기 위해 적어둔 문장이었을 것이다.
‘야근은 내 자리, 승진은 남의 자리’라는 글을 쓰며
나를 다독이던 날들도 함께 떠올랐다. 상처를 꺼내놓아 마음은 아렸지만, 승진 명단에 이름이 없어 투명인간이 된 것 같던 그 순간, 나는 나에게 위로를 건넸다.
마치 상처에 마데카솔을 바르듯
여기까지 잘 왔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만 떳떳하면 된다고.
비록 뒤처진 것 같아 보여도
언젠가는 내 인생의 한편에도 레드카펫이 깔릴 거라는 희망만은 놓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생각해 본다.
뒤처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걸어갈 자리에 나만의 레드카펫을 깔고 있다.
상처는 언젠가 아문다.
지금은 아직 빈틈없이 아프지만 언젠가는 여백이 생길 것이다. 나는 그 여백을 글로 채우려 한다.
그러면 다음에는 조용하고 단단하게 나를 지키는 말을 할 수 있겠지...
오늘은 아직 아픈 날이라 말 대신 기록을 남긴다.
아물기 전의 기록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모든 순간을 글로 남긴다.
예전에 끄적여 두었던 조각 같은 기록들을 모아
다시 글로 만든다. 모든 상처가 곧바로 의미가 되지는 않아도, 모든 사건이 당장 말이 되지 않아도
그 순간을 남겨두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온다는 걸 이제는 안다.
상처는 여백이 되고,
사건은 태도가 되고,
메모는 결국 글이 되어 돌아온다.
[엔딩 크레딧]
(자막 제공: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협찬: 메모장, 새벽의 생각들)
(감독: 감정에 과몰입하지 않으려 애쓴 마음
(각본: 아물기 전이라서 써버린 문장들)
(출연: 오늘의 나, 그리고 지나간 말들)
※ 본 기록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되었습니다.
https://brunch.co.kr/@721b65ec84434ef/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