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삶과 표현

그리고 나의 삶과 표현

by 천세곡

윤동주의 시는 워낙 유명한 터라 학창 시절에 배웠던 교과서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잊을 만하면 다시 접할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영화 '동주'를 통해서였다. 꽤 잘 만들어진 영화여서 그의 삶을 더 깊이 생각해 보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시를 읽는 것만큼이나 그 시를 쓴 시인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다. 시인의 삶을 이해할 때, 그가 써낸 표현들을 조금 더 깊이 있게 해석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윤동주의 시들을 다시 읽어 내려가며 '시인 윤동주' 이전에 '인간 윤동주'에 대해 주목하고 싶었다.


윤동주의 시를 통해 본 그의 삶 속에는 '자아성찰'과 '자기 연민'이 녹아져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서시]에서는 한 점 부끄러움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매우 높은 기준을 자신에게 들이대고 있다. 신을 제외하고서 죽는 날까지 한점 부끄러움이 없을 존재는 없음에도 그는 그 높은 기준에 자신이 이르지 못함을 한 없이 부끄러워했다. 또한 [자화상]이라는 시를 통해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생을 동정이라도 하는 듯 자기 연민의 눈빛으로 한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윤동주가 살았던 일제 강점기 시절, 그가 견뎌내야 할 식민 통치하의 상황들 속에서 썼던 그의 시는 제목처럼 결코 '쉽게 씌어진 시'는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가진 높은 기준과 세심한 성격으로 인해 고치고 또 고쳐 써냈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과 끊임없이 마주했다. 자신의 약함을 채찍질하는 한편 동정하면서 안아주었다. 내면의 약함과 싸워내면서 내뱉은 자기 고백들은 그의 손끝에서 한 편의 시로 완성되었다. 인간 윤동주는 시를 통해서라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윤동주 시인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높은 기준과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늘 나를 괴롭히는 스트레스였다. 무엇을 할 때 높은 기준 때문에 쉽사리 시작하기가 어려웠고, 시작한 후에도 늘 남들보다 느렸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기준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나 자신을 향한 기준은 조금 높아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 내가 쓰고자 하는 글들 역시 자아성찰과 자기 연민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표현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삶은 어떠한 지 그리고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기보다 그것을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당당한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약함과 싸워내고 때로는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나를 안아주며 내뱉은 고백들이 나의 손끝에서 한 편의 글로 완성되었으면 좋겠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계속 쓰고 싶은 이유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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