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샷해보는 게 소원이다.

100일의 글쓰기 - 31번째

by 천세곡

내가 제일 부러운 사람은 재벌도 연예인도 아니다. 시원한 냉수 한 잔을 원 샷 하는 사람이다. 요즘 같아서는 정말 다른 건 필요 없다. 그게 뭐라고 너무나도 부럽다.


그렇게 부러운 이유는 물을 잘 마시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는 꿀꺽꿀꺽 잘 마셨는데 작년 여름부터인가 물이 잘 넘어가지 않기 시작했다.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려는 순간 목의 근육이 ‘안 돼! 너 가지 마.’ 하고 붙잡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뿐만이 아니다. 그의 친척뻘들은 죄다 내 목을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 액체 종류들은 통틀어서 목 넘김이 부자연스럽다.


이비인후과에서는 역류성 후두염이라고 하고, 내과에서는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했다. 혹시 몰라 지난달 건강 검진을 받을 때 '제 식도 좀 자세히 봐주세요.'를 시전 했지만, 내시경 검사 결과도 괜찮다고 했다. 천만다행인 것은 액체류만 삼키는 것이 어려울 뿐, 그 외의 음식은 잘 넘어간다. 이놈의 모가지가 물과 음료 종류만 골라서 왕따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도 한 잔 시원하게 못 마시고 있는 나를 보면 그야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물을 잘 삼키지 못하는 삶은 뭐랄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조차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해내는 그것을 못하는 것이다. 의식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는 그 행위가 나에게는 매우 신경 써서 긴장하고 수행해야만 한다. 말 그대로 물 마시는 것 자체가 ‘일’이 되어버렸다.


이 작은 것 하나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삶의 질을 훨씬 많이 떨어뜨렸다. 무엇보다 이까짓 거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는 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수시로 목마를 때마다 아무 생각 없이 마셔야 하는 물인데 나는 마치 물 마시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린 사람 마냥 살고 있다.


물론, 물을 전혀 못 마시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지금 내가 이 글을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을 연속해서 벌컥벌컥 마시지 못하고, 보통 사람이 한 번에 넘기는 한 모금의 물도 여러 번에 걸쳐서 넘겨야 한다. 그나마 좀 용이한 빨대를 이용해서 마시기도 하고, 맹물보다는 나름 맛이 있는 보리차나 현미차를 깨작깨작 마신다. 밥을 천천히 먹어서 자칭 ‘서식좌’인데, 이제는 물마저도 천천히 아주 조금씩 마시는 처지다.


원인은 스트레스 때문인 듯하다. 처음에는 부인하고 싶었다.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은 맞지만, 내가 특별히 남들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K-직장인들이라면 다들 이 정도 힘듦은 안고 살아가는 것이지 했다. 스트레스가 몸으로 나타나고 오작동을 일으키는 현실을 보며 내가 너무 유난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럴수록 불안감은 올라가고 의식하게 되어서 목 넘김은 더 부자연스러워졌다.


단골 한의원 원장님도 가급적 심리적 안정을 찾으라고 조언해 주셨다. 최대한 스트레스를 풀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한 덕분에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는데 얼마 전부터 증상이 다시 심해졌다. 직장에서 일어난 모종의 일로 더 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골적인 편 가르기는 더 심해졌고, 정치질로도 만족 못했는지 대놓고 인격적인 모독까지 당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몸 관리만으로는 안 되고, 마음관리도 적극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는 누구보다도 힘들었는데 애써 스스로를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남보다 나를 더 탓하면서 말이다. 그동안 스트레스를 풀어내지 못한 채 속으로만 삼켜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삼키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삼켜온 탓에 정작 속 시원히 마셔야 할 물을 삼키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삶을 지탱하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너무 당연스럽게만 여기고 정작 그것에 대한 감사함은 잊고 살았다. 딱히 내가 뭘 해내지 못하더라도 멀쩡히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팔다리의 움직임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소화시킴이 모두 감사한 일이었다. 앞으로는 이러한 마음들을 좀 더 배워가야겠다. 내 목을 적셔줄 한 잔의 물과 함께. 아주 천천히 조금씩.





*사진출처: Photo by Giorgio Trovat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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