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지켜낸 무기
은행나무는 현대인들이 바쁜 일상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우리의 마음도 가을빛으로 물들인다. 덕분에 삭막한 도심 한가운데에서도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곳곳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수목 중 하나가 은행나무다. 은행나무를 도심의 가로수로 많이 심은 이유는 공해와 병충해에 강해 생존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불이 잘 붙지 않아 방화수 역할은 물론 대기 오염 물질을 정화하는 기능까지 있다고 하니 가로수로는 정말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장점들을 한방에 박살 낼 수 있는 강력하고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고약한 냄새다. 은행 열매껍질에 포함된 빌로볼과 은행산 때문에 나는 악취인데, 냄새가 심해도 너무 심해서 코가 마비될 지경이다.
은행 열매의 냄새는 KF94 마스크 정도는 아주 우습게 뚫고 들어온다. 냄새뿐 아니라 미관상 보기에도 좋지 않다. 길바닥에 자유낙하로 떨어진 탓에 터지기 일쑤고, 그나마 멀쩡한 것도 사람들 발에 밟혀 짓이겨져 지저분해진다. 그리고 밟으면 미끄러워서 넘어질 위험도 크다.
지자체들 마다 관련 민원으로 인해 골머리를 썩고 있고 도로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자영업자들도 골치가 아프다고 한다. 은행 열매가 적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몇 그루만 있어도 그 주변은 그야말로 지뢰밭이 되기 때문이다. 터진 열매들은 끈적거리고 바닥에 눌러붙는 특성 때문에 청소도 쉽지 않다.
몇 해 전부터 이를 방지하고자 여러 가지 대책들이 나왔다. 지자체 별로 은행이 익기 전에 진동 수확기를 동원해 미리 털어내기도 하고, 나무마다 수집망을 씌워서 은행 열매가 망 안으로만 떨어지게도 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약물주사를 놓기도 하고, 유전자 기술을 이용해 암수를 미리 구분한 뒤 암나무를 수나무로 대체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기계를 이용해 억지로 흔들어 열매를 털어내거나 약물을 이용하는 것이 나무에 좋을 리 없다. 암나무 대신 수나무만 심는다든지 수집망을 나무마다 덮어 씌워놓는 것도 영 자연스럽지가 않다. 큰 불편이 있다면 이러한 조치들이라도 취해야겠지만 너무 인위적으로 손을 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보다 나무를 더 생각한다고 한들, 당장 내 발아래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 가을의 향기로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냄새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 앞에 은행나무가 서 있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괴로운 냄새이지만 은행나무에게는 오랜 세월 동안 병충해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낸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 무기 덕분에 은행나무는 지구상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지금까지 우리 옆에 있다. 어쩌면 앞으로도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우리와 함께 살아줄 나무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주는 이로움이 더 많은 은행나무를 너무 골칫덩어리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후 위기로 온 지구가 앓고 있고 온 세계가 혼란스럽다. 대자연을 회복시키겠다는 커다란 포부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일상 속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외출 후 집에 들어갈 때 신발 한번 털고 들어가는 번거로움을 당분간은 기꺼이 감수하면서 말이다.
Photo by Hakan Nural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