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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생의 학교 소감문

지랄하지 말랍니다

by 박점복
"선생들이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한다구? 지랄하지 말라고 그래."
우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얘들이 말을 듣지 않아 어쩔 수 없어 매를 들어?
위선 떨지 말라고 그래, 위선이 다른 건 줄 아니? 그게 바로 위선이야.
스승의 은혜 따윈 애당초 없었어. 그렇잖아?(중략)


어느 학생의 학교 소감문에 나타난, 쉬쉬하며 감추고만 있을 수 없는 안타까운 사실을 접하면서 괜히 도둑질하다가 들킨 놈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요즘(최근도 아니고 무려 10년도 훨씬 전) 아이들의 대담함을 새삼 확인하며 앞뒤 헤아려 줄 것을 부탁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임을 알기에 난감했다.


지랄하며 위선이나 떨고 있는 죄인인 교사들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괜히 한마디 했다가는 어린 저들에게 또 변명이나 해대는 비겁한 놈들 소리 들으며 본전도 못 찾을 테니 말이다.


그런 학생의 기준에 맞는, 이해하고 사랑 많은 교사는 어떤 교사이며 어떻게 하면 위선 안 떠는 것으로 비칠지? '스승'이길 기대하며 꿈속을 헤매는 교사가 있기나 할까마는 어떤 교사가 진정 이런 학생들의 구미에 맞는 스승, 아니 교사일 수 있을까?


이상적인 사이버 인간을 컴퓨터로 만들 수 있는 시대라는 데 머지않아 입맛에 맞는 교사가 저들 손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을는지? (아니 벌써 우리네 최첨단 기술이면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과 똑같이 하소연한다는 것도 우습고 처지가 더 초라해지는 듯 해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수업에 참여하든 말든,
숙제를 하고 안 하고를 왜 참견이야


또한 교실이 저 혼자만의 것인 양 떠들며 수업을 방해해도, 인간이 되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간섭 말고 당신 할 일이나 조용히 하고 '나가!'라는 것인데. (조금은 심하고 아주 유별난 사례임을 밝힌다. 그러나 현실이기도 하다.)


이름도 희한한 가수들, 흠잡을 데 없이 잘 나가는 연예인들로 꽉 채워진 저들에게 교사는 '왕따' 1위일 수밖엔 없지 않겠는가? 가수가, 연예인이 저들에게 '숙제해라', '규칙 지켜라' 잔소리하며 싫은 소릴 했더란 말인가? 그러기에 마냥 좋아 죽을 수밖에. 혹시 싫은 소리 안 하며 비위나 살살 맞춰주면 불쌍(?)해서 좀 인정해 줄지?


조그만 교실에 벌레 새끼들처럼 우글우글하게 집어넣고...... 징그러워! 학교? 더러운 곳! 에이즈 병균보다 더 더러운 병균들이 득실대는 곳, 기분 나빠!


이런 학교에서 저들은 과연 뭘 배울 수 있을까? 전염될까 깨끗한 저들이 오기나 하겠는가? 이 모든 게 마치 아무런 힘도 권한도 없는 교사들 때문으로 몰아세우며 정죄하니 유구무언이며 함께 피해자일 수도 있는 처지에 더욱 화만 날 뿐이다. 힘 있는 교육 당국의 반응이 궁금하다.


교육 당국과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다고 알고 있을까? 종교의 경전 인양 교과서는 조정, 조절의 대상일 순 없다. 입시 형태가 이를 허용치 않기에 재미있건 없건 그냥 가르쳐야 한다. 다른 교재를 활용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핑계 대지 말란 소리가 여기저기서 윙윙 거린다)


현장의 열악함을 모르면서 교육의 질을 논하는 자들의 한심함은 열악함만 탓하며 제 할 일을 안 하는 교사들과 함께 속히 사라져야 한다.


또한 당국의 간섭은 최소한에 그쳐야 맞다. 교과 지도에 관한 한, 나라가 인정하여 자격을 부여하였기에 교사에게 자율권을 최대한 허용해야 한다.


헌데 입시의 틀이 이미 획일화되어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을 수밖에. 교수 방법, 수업시간 활용, 교재 선정, 학생 평가 등 이미 짜인 틀에 맞춰야만 하는 로봇 같은 교사와 학생으로는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시간 재미있게 학생들 흥미와 학습 의욕 붕붕 띄워주는 교사 있고 말고다.


가능성과 능력이 계발되고 인정받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권한도 주지 않으면서 잘못된 교육의 모든 책임은 교사가 늙어서, 무사안일에 빠져서, 실력이 없어서 라며 교사에게만 뒤집어 씌우는 현실은 아직도 거의 꿈적도 않고 있지만 말이다.


그럴 수 있음을 절대 부정하지 않으며 겸손하게 수긍함이 전제임을 밝힌다. 게디가 극히 일부일 뿐 이기에 희망의 끈을 결코 놓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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