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차, 2부_전쟁의 시작과 끝을 보기 위한 발걸음

가족과 떠난 독일 렌터카 자유여행

by 혼뽐아재

2025년 6월 30일

독일 렌터카 자유여행 8일차, 2부_세계 2차 대전의 시작과 끝을 보기 위한 발걸음


1부에 이어 뉘른베르크 탐방 2부를 올립니다.


갑자기 뜨거워진 뉘른베르크 날씨에도 시내 탐방을 마치고 시내 주차장에 주차한 렌터카를 타고 "국제 군사 재판소(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IMT)"였던 "뉘른베르크 정의궁(Nürnberg Justizpalast)"으로 이동했습니다.

시내 주차비는 약 3시간에 'EUR 7'를 계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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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정의궁(Nürnberg Justizpalast)"에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바로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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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건물로 들어가자 친절해 보이는 보안담당이 다가와서 "뉘른베르크 재판 기념관(Memorium Nürnberger Prozesse)을 보러 왔냐"고 물어 보더니 "이 곳은 실제 법원(Justiz gebäude)이고 나가서 왼쪽 끝으로 가면 있다"라고 설명을 해 줬습니다.

IMT로 사용했던 "뉘른베르크 재판 기념관"으로 가서 건물을 보니 생각보다 법원으로 사용하는 본 건물에 비해 작고 초라했습니다. 이런 곳에서 전범 재판을 했다는 것에 놀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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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세계 2차 대전의 주요 독일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위한 장소로 선택되었는데, 이유는 당시에 건물 손상이 거의 없고 크기가 충분하고 단지 내에 대형의 감옥소도 있었기 때문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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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뉘른베르크 시가 선정된 것은 나치당이 이곳에서 대규모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나치의 전통성을 홍보한 곳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이 건물에 위치한 600호 법정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아직도 이 법정은 특히 살인 사건 재판을 위하여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1층(2층)은 법원 직원들의 사무실 있어서 안내를 안하고 있습니다.재판이 있으면 방문이 안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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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성인 'EUR 7.5')를 계산하고 오디오 가이드를 받았습니다. 한국어가 없어서 영어가 세팅된 가이드로 요청했습니다.

IMT로 입장하자 동양인은 거의 없고 서양인들만 열심히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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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해외를 다니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방문한 나라의 풍경과 맛집도 좋지만 그 나라의 역사를 좀 볼 수있는 기회를 가져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주로 다니는 곳에는 한국인들이 거의 오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가끔 한국 미디어에 노출된 사진 찍기 좋은 곳이나 맛집으로 알려진 곳으로 지나 칠때면 어김없이 한국인들이 줄서 있습니다.


제가 본 많은 서양 여행객들은 그 나라의 역사와 지나온 흔적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는 모습을 봅니다.

이제 우리도 여행의 흐름을 바꿀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계 2차 대전은 1945년 5월 8일 22시 43분(유럽 중앙시 기준) "빌헬름 카이텔" 야전사령관이 "무조건 항복 문서(Unconditional surrender)"에 서명하면서 종전이 되었습니다.

항복문서 서명_Field_Marshall_Keitel_signs_German_surrender_terms_in_Berlin_8_May_1945.jpg

종전후 국제 군사 재판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이 자격을 갖고 진행했습니다.


모든 나치 간부들은 종전후 4일만에 모두 기소되었습니다. 죄목은 대부분의 피고인은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 혐의였습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살해한 사건은 재판에 중요한 쟁점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은 하급 가해자들을 상대로 12건의 추가 재판을 진행했으며, 이 재판은 홀로코스트에 더욱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침략 행위를 소급적으로 취급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많았지만, 국제법 위반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이 재판의 시도는 "국제형법(International Criminal Law)의 진정한 시작"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국제 군사 재판은 1945년 11월 20일에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나치 인사 중 가장 중요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자살을 했기 때문에 재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항복전 나치 전범(이름 명기).jpg

1946년 10월 1일 IMT는 검찰이 침략을 가장 중대한 혐의로 간주한 데 동의하며 판결문에서 "전쟁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기 때문에 "학살, 노예화등의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국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일부 전쟁 범죄와 다른 최고의 국제 범죄이며, 그 자체 내에 전체의 축적된 악이 포함되어 있다"고 명시했다고 합니다.


판사들은 형량에 대해 장황하게 논의했습니다. 최종 12명의 피고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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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12명은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 당시 제국 원수)",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 당시 외무부장관)", "빌헬름 카이텔(Wilhelm Keitel, 당시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

"에른스트 칼텐브루너(Ernst Kaltenbrunner, 당시 제국 안보 본부장),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당시 NSDAP 외교정책실장)", "한스 프랑크(Hans Frank, 당시 총독)", "빌헬름 프리크(Wilhelm Frick, 당시 내무부 장관)",

"율리어스 슈트라이허(Julius Streicher, 당시 프랑코니아의 지방관구장)", "프리츠 자우켈(Fritz Sauckel, 당시 노동 파견 총 전권 대사)", "알프레드 요들(Alfred Jodl, 당시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 작전 참모총장)",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 당시 오스트리아 총리)", "마르틴 보어만(Martin Ludwig Bormann, 당시 나치 독일의 총통 개인비서)"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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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괴링 뿐만 아니라 재판정에 선 많은 나치 고관들은 대부분 본인들은 유대인 학살을 몰랐다고 주장했고, 이를 모두 SS나 그 총수인 "하인리히 힘러"에게 책임을 전가했다고 합니다.

정작 힘러 또한 살아 있을 때 "나는 유대인들을 다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괴벨스 그 인간이 과격해서 그랬다."고 궁시렁거리고 다녔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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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빌헬름 카이텔"만은 "나는 나의 총통에 대해 충성을 한 것이다. 그리고 소련군도 스탈린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하지 않나?" 라고 반문하였으며

항복 직후 전쟁범죄자로 체포당해 침략전쟁의 기획 및 전쟁범죄의 책임자로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었을 때 군복의 계급장 및 훈장, 약장, 휘장 등을 전부 소련의 반대로 탈거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카이텔은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하는 다른 전범들과는 다르게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면서 재판에 임했고, 오히려 자신에게 내려진 혐의를 인정했으며 사형을 선고받을 것도 각오했다고 합니다.

당시 미 육군 군의관이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정신분석가를 담당한 "더글러스 케리" 소령은 "카이텔 원수는 목적을 잃어버린 자로 자살 위험이 높다"라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헤르만 괴링"또한 일반 범죄자로서 교수형에 처해지는 대신 군인으로서 총살형을 선고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법원은 이를 거부했고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날 밤(10월15일) 시안화칼륨 캡슐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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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쟁 막바지에 도망을 간 "마르틴 보어만"은 궐석 피고로 기소되어 사형을 언도되었지만 독일 북구에서 행방불명이 되었고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남미나 스페인으로 도피했다는 설이 나오던 중 1972년 베를린의 한 철도 공사장에서 신원불명의 유골이 발견되어 DNA검사를 통해 "마르틴 보어만"으로 확인되어 논란이 종식됐다고 합니다.


1946년 10월 16일에 10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당시 마지막까지 군인으로서 전쟁을 지휘하던 일부 사형수들은 총살을 요청했으나 소련의 강력한 반대로 모두 교수형으로 진행됐다고 합니다.

이유는 소련이 세게 2차대전에서 독일에게 1,000만 명이 부상당하고 2,000만 명이 넘는 희생을 당한 것에 대해 모든 사형수를 추가적인 고통을 주면서 오랫동안 매달아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사형시키라고 강하게 요구한 것을

받아들여 집행자 측에서 소련의 요구 대로 줄길이를 조절하면서까지 고통스럽게 교수형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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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남긴 마지막유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신이시여, 독일을 지켜 주소서!" 라고 외친 뒤에 "나의 마지막 소원은 독일인이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 것과 동서양이 서로 이해하는 것이오. 마지막으로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빌헬름 카이텔", "나는 하나님의 축복이 모든 독일인들에게 있기를 바란다. 200만이 넘는 독일 군인들이 아버지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이제 나도 아들들을 따라간다. 모든 것은 독일을 위해!"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나는 우리 독일 국민과 나의 조국을 열성적으로 사랑했고 봉사했다. 나는 우리 국민의 법에 따라 나의 의무를 다했다. 그리고 곤란한 시대에 우리 국민들이 오로지 군인같은 자들에게 끌려다닌 것이 유감이다. 범죄가 이뤄진 일도 유감이지만 나는 여기에 관련하지 않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범죄들이 저질러졌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독일이여 영원하라."


-"한스 프랑크", “투옥 중 나에게 호의를 베푼 모두에게 감사한다. 신이시여. 제발 나를 자비로 맞아주소서.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빌헬름 프리크", "불멸의 독일이여 영원하리!"


-"율리어스 슈트라이허", 교수대에 오르기 직전에 "하일 히틀러!"라 외쳤고, 교수대 위에 올라서서 "오늘이 1946년 푸림 축일(부림절)이구만" 이라며 썩소를 날렸고, 용수를 씌울 때는 "언젠간 볼셰비키 놈들이 니들 목을 매달 거다!"라고 저주


-"프리츠 자우켈",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 내 형량은 불공평하다. 신이여, 독일을 보호하소서!"


-"알프레드 요들" "경의를 표하노라, 나의 영원한 독일이여!".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이 처형이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의 마지막 행위가 되기를 바라며, 이 세계대전에서 얻은 교훈은 사람들 사이에 평화와 이해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독일을 믿는다. 우리 같은 과거 구체제의 유물들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였다고 합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만은 "No(없다.)"로 매우 간단했다고 합니다.


유해는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세운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미군들에 의해 비공개로 이자르(Isar)강의 지류 한 곳에 뿌려졌다고 합니다.

1972년에 발견된 "마르틴 보어만"의 유해는 1999년 네오나치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독일 정부에 의해 화장되어 발트해에 뿌려졌다고 합니다.


지금의 600호 법정으로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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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세계 2차 대전 전범의 공소시효는 말소되고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전쟁의 광적인 시작과 초라한 끝을 본 뉘른베르크였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글귀를 되새기며 뉘른베르크의 짧은 탐방을 마치고 저희는 프랑크푸르트로 향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로 들어가기전에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주유를 했습니다.

이번에 주유는 '1 liter 에 EUR 1.589'였으며 '36,78 liter, EUR 58.44'를 주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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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박을 할 프랑크푸르트 호텔은 "Hotel Palmenhof Frankfurt"로 독일의 세련됨과 고즈넉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호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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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Check-in을 마치고 걸어서 저녁식사를 하기위해 도보로 이동했습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독일와서 먹어보지 못한 학센을 먹기로 했습니다.

약간 늦은 시간이라 식당들이 문을 닫아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으나 그래도 평이 좋은 식당이 문을 열고 있어서 15분을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식당 이름은 'Immer Satt'로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늦은 저녁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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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Große Salat der Saison(제철 샐러드), Knusprig Gegrillte Schweinshaxe(바삭한 껍질을 가진 육즙 가득한 구운 돼지 족발), Gemischter Würstchen-teller(모듬소시지), Weizen Hell Bier,

Allgäuer Büble Bayrisch Hell Bier, Giner Ale"등을 주문해서 독일의 마지막 밤을 즐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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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대로 팁포함 'EUR 97.24'를 계산했습니다.


이제 독일 여행의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내일은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탐방한 후 간단한 쇼핑을 하고 공항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티켓팅을 하면 저희의 여행이 마무리가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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