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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작가병 말기입니다만

by 이소희

‘작가님이시죠?’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퇴직 후 처음으로 맡게 된 외부 프로젝트—모 시청의 홍보 책자 제작을 위한 회의 자리에서 누군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작가님. 처음 듣는 말이었다. 관례적인 호칭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 이름 옆에 처음 붙은, 또 다른 역할.

아마, 그 병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전까지 나는 오랫동안 공공기관에서 일하며 ‘과장님’, ‘팀장님’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기획과 홍보를 맡아 기관장의 인사말을 다듬고, 정책자료와 연설문을 썼다. 내가 쓴 글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글 어디에도 내 이름은 남지 않았다. 조직의 목소리를 대신한 문장이었고, 나는 그저 전달자였다.

그렇게 이름 없는 글을 쓰던 시간을 지나, 퇴직 후 처음 마주한 ‘자유’는 생각보다 낯설고 불안했다. 소속이 사라진 허탈함 속에서,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브런치 계정을 열고, 작가 신청서를 썼다. 짧은 자기소개 한 문장을 붙잡고 며칠을 망설였다. 처음으로 ‘나의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매주 글을 올렸고, 그 글들을 모아 전자책을 냈다. 몇몇 공저도 참여했다. 하지만 막상 내 이름으로 글을 쓰려니,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글쓰기 비법서들을 잔뜩 사 모았고, 밤마다 침대에 누워 ‘나는 어떤 작가가 될까’ 상상에 빠졌다. 인터뷰를 하고, 강연을 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가는 미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십 권의 책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기획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지만 돌아온 건 ‘저희와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짧은 메일 한 통뿐이었다. 며칠을 노트북을 켰다 끄고, 또 켰다 끄고, 넷플릭스를 보며 혼자 속상해했다. 열이 오른 듯 들떠 있던 글쓰기는 어느 순간 식어버렸다. ‘아무도 안 읽을 텐데, 왜 써?’ 같은 말로 나를 몰아붙이며, 거절 하나에 하루 종일 앓아누웠다.

이 병에는 약도 없고, 병원도 없다. 스스로 ‘작가’라는 이름을 붙들고 버텨야 하는 병이다.


진단명: 작가병. 자가면역질환처럼, 내가 나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병이다.

쓰고 싶은 열망과 쓰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스스로를 의심하고 몰아붙인다.

'작가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그 답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상태.

어쩌다 글이 잘 써지는 날이면 “역시 나는 작가야” 싶다가도, 안 써지는 날엔 의심이 시작된다. “나는 그냥 자의식 과잉 아닐까? SNS에서 글 쓰는 척하는 사람 아닐까?” 그렇게 자책하면서도 글쓰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글 쓰는 분위기를 만든다고 디퓨저를 사고, 만년필을 꺼내 쥐고, 집중에 좋다는 음악을 틀어놓는다. 작가 행세를 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달래는 날들.


작가병의 증상은 교묘하고도 집요하다.

글을 쓰겠다는 나와 포기하겠다는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번갈아 등장한다. 어떤 날은 문장 하나도 쓰지 못하고, 어떤 날은 숨을 쏟아내듯 글을 쓴다. 안 쓰면 더 아팠다. 마치 말을 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병처럼.

올해, 나는 결국 직접 책을 기획하고 출판사까지 만들어 책을 냈다. 『슬니멀라이프』라는 제목의 책이다. 제목부터 디자인, 편집, 마케팅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꾸역꾸역 해냈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고, 매일이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돌아보면, ‘작가님’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았던 그 순간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작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이제는 글과 책이라는 형태로 조금씩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이 글은 그 병의 경과 기록이다.

그리고 그 병에 걸린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쓰며 버텨내고 있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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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