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안에서 던진 상자가 복도 바닥을 스르륵 미끄러져 정확히 현관 앞에 멈춰 섰다. 마치 계산된 묘기 같았다. 택배기사가 층층이 배달할 집의 버튼을 눌러놓은 덕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그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오후 2시, 생각보다 세상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상자를 안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엔, 무게감 있는 하루가 배어 보였다.
나는 단지 안 슈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부스스한 머리로 양말도 없이 슬리퍼를 신은 채 나섰다. 바람은 따뜻했지만 햇빛은 생각보다 강했고, 장바구니엔 김치 한 봉지와 두유 몇 개가 덜렁거렸다. 몸이 은근히 피곤했다. 허리도 어깨도 괜찮은데, 이상하게 피로했다. 어쩌면 퇴직 후 처음 맞는 평일 아침이 낯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밖에선 공사장 소음이 분주하게 들려왔고, 벤치엔 개를 끌고 나온 할머니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움직이는 모든 풍경 속에서, 나만 멈춰 선 느낌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장바구니를 부엌에 내려놓고, 천천히 손을 씻었다. 거실로 스며든 햇살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소파에 앉아 있아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시간은 많은데 마음은 불안했다. 퇴직 후의 자유는 기대했던 여유가 아닌, 익숙함이 사라진 불편함이었다. 매일 아침 나를 기다리는 일이 없고, 누군가의 연락도 없다는 현실이 점점 나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정해진 루틴이 사라지자 하루는 마치 경계가 지워진 수면처럼 흘러갔다.
‘정체성의 상실’과 ‘사회적 연결의 단절’—퇴직 후 불안을 설명하는 뉴스 속 문장이 떠올랐다. 그 말이 이상하리만치 내 얘기 같았다. 직함도, 역할도 사라진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여전히 쓸모 있는 사람일까. 그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메모하듯, 그날 본 풍경 몇 줄, 문득 스친 생각 하나, 잊고 지냈던 기억들. 보여줄 생각도 없이, 단지 어딘가에 나를 붙들어두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 건 몸에 밴 동작이었다. 이제는 회신할 메일도 없고, 처리할 업무도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 그냥 노트북을 열고 뭐라도 써보자. 그렇게 타닥타닥 손을 움직였다.
글쓰기는 단순한 위안 이상이었다. 생각을 적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리되고, 불안이 가라앉았다. 실제로 미국 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James W. Pennebaker) 는 감정이나 경험을 솔직하게 써 내려가는 글쓰기는 스트레스를 줄이고 면역력을 높이는 등 심리적·신체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표현적 글쓰기’는 뇌의 긴장 반응을 완화하고, 감정의 방향을 잡는 데도 도움을 준다고 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 조용한 시간들이 나를 조금씩 회복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마음에 드는 문장을 쓰고 나면 몇 번이고 읽어보았다. 단어 하나에도 마음이 움직였고, 매끄러운 문장에선 안도감이 들었다. 남편에게 보여주고 “괜찮네”라는 말 한마디에 들뜨기도 했다. 나를 다시 누군가에게 보여준 기분이었다. 뭔가 작지만 분명한 시작점에 서 있는 듯했다.
어느새 ‘쓰는 나’를 자꾸 의식하게 됐다. 표현을 다듬고, 문장을 곱씹고, 한 줄이 마음에 들면 하루가 견딜 만해졌다. 그렇게 글쓰기는 조금씩 내 삶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작가처럼’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더 잘 쓰고 싶고, 더 깊이 있게 표현하고 싶어졌다. 아직은 서툴지만, 분명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순간, 글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붙들려는 고집스러운 증상, ‘작가병’의 첫 잠복기가 조용히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