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오전 11시. 오래된 건물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파란색 문이 하나 보였다.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하얀 강의실 안에 수강생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아직 어색한 분위기 탓인지 한 자리씩 건너 앉아 있었고, 눈인사만 오갈 뿐 말소리는 거의 없었다. 정적과 긴장 사이, 묘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수원에서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두 시간을 달려 수업에 갔다. 배우겠다는 의지 하나로 먼 길을 택했지만, 매번 강의실 문 앞에 서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곳은 내 글이 냉정한 검증대에 오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수업은 이론 한 시간, 그리고 지난주에 쓴 글을 낭독하고 피드백을 받는 시간으로 구성됐다. 낭독 시간엔 살짝 숨이 가빠질 만큼 긴장감이 돌았다. 같은 주제로 글을 써왔지만, 글은 전혀 달랐다. 방송국 PD는 예능 대본처럼 써내 웃음을 자아냈고, 웹툰 작가는 장면 묘사가 탁월했다. 휴직 중인 교사는 발표문처럼 정돈된 글을, 미대 교수는 논문처럼 주석을 달아 모두를 놀라게 했다.
첫날, 나는 그들의 글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다들 비슷한 수준일 줄 알았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겉으론 박수를 쳤지만 속으로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 글은 너무 밋밋한 거 아닌가?’ ‘이 수업, 괜히 신청한 건 아닐까?’
결국 내 차례가 왔다. 내가 쓴 문장인데도 낯설고 어색했다. 몇 번이고 버벅거리며 겨우 읽었다. 마지막 문장을 힘겹게 마쳤을 때, 선생님의 질문이 날아왔다.
“이 문장은 무슨 의미입니까?”
피드백은 가차 없었다. 문장 구조, 습관적인 표현, 구성의 허술함까지 빠짐없이 짚였다.
돌려받은 원고는 빨간 펜 자국으로 가득했다. 하얀 종이 위에 선연히 그어진 빨간 글씨들은, 글 전체가 해체된 것 같았다. ‘나는 글을 쓰면 안 되는 사람일까?’ 그 질문이 시뻘건 잉크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이라도 수업을 그만둘까? 나만 이렇게 못 쓰는 걸까?’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내 글을 어떻게 들었을지 상상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쥐구멍이 있었다면 기꺼이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어김없이 강의실에 나갔다. 수강생 수는 점점 줄었고, 어느새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나도 흔들렸지만, 버티는 것 또한 글쓰기만큼 중요한 일이라 믿고 싶었다. 물론 다들 나처럼 자책하며 도망친 건 아니겠지만, 괜히 동질감이 들었다.
지금도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여전히 잘 쓰고 싶은 마음은 뜨겁다. 단지 쓰는 걸 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이 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나도 안다. 그런 내가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잘 쓰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누군가의 반응’에 꽤 쉽게 흔들린다는 것이다. 아직도 ‘공감’ 버튼 하나, 짧은 댓글 한 줄에 하루 종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아직도 명확한 답은 없지만,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사실이 나를 계속 쓰게 만든다.
아마 나, 관종기질이 있는 것 같다. 적당히 외롭고, 적당히 인정받고 싶은.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 병을 앓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와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비교다. 다른 사람의 좋은 글을 볼 때마다 조급해진다. '나만 뒤처지는 걸까?' 그 불안은 집요해져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더 오래 붙잡게 만든다. 고치고 또 고치다 보면, 어느새 처음 쓴 문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처음엔 그냥 책이 좋았다. 그 마음은 작가들에 대한 존경으로, 곧 동경으로 바뀌었고, 결국 ‘나도 쓰고 싶다’는 뜨거운 욕망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글쓰기라는 열병에 감염된 사람이다.
이 지독한 병. 다행히도 그 부작용은 꽤 괜찮다. 상처보다는 성장을 남기니까. 오늘도 나는 그 증상에 충실히 반응하며,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