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리다- 4장&에필로그>

그리고 시즌 中 '여름'

by 이작가야

[4장]


작업실 불이 들어온다.

아라, 승현 등장해 작업실을 치운다.

정리가 끝나고 소파에 앉는 승현.

신문을 본다.


승현 아라야, 신문에 우리 집이 나왔어.


아라, 커피를 가져와 승현에게 주고 옆에 앉는다.


아라 어디?

승현 여기. 어제 오후 일인데? (신문을 보며) 산사태가 난 곳에서 기절한 여행객 세 명 구출. 권모 씨와 오모 씨는 서로 등을 기댄 채로 발견, 이모 씨는 절을 하는 모양 새로 굳어 있는 채 발견되었다….

다행히 셋 모두 경미한 부상을 입었을 뿐.

아라 아-. 이든 씨….

승현 이모 씨는 입원 중 귀신을 물리쳐야 한다며 각종 십자가와 불상을 들여와 골치를 앓고 있다.

이에 담당 의사는 PTSD라고 판단, 치료 중에 있다.

아라 큰일이네.


승현, 아라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


승현 이제 가봐야겠다.

아라 응. 나도 갈 거야.

승현 우리 다시 돌아가는 거지? 행복했던 순간으로.

아라 아니. 말했잖아. 이제 시계 바늘이 움직인다고.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라,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다.


아라 아직 비가 오네.

승현 장마철이니까.

아라 여긴 비가 심하게 많이 와. 시원하긴 해.

승현 덥고, 습하잖아. 찝찝하고 끈적이고.

아라 덥고, 습하고, 찝찝하고, 끈적이고.

(사이) 우리도 그랬잖아. 그런 세상 속에 우리였잖아.

승현 지금도.

아라 아니, 이제 우리는 기억일 뿐이야. (사이)그리고 좀 자세히 얘기 해봐.

내 시계 바늘이 멈추고 오빠는 어떤 하루를 보낸 거야?

승현 그 얘긴 할 수 없어. 행복한 순간이 아니니까.

아라 그래도 듣고 싶어. 뜸들이지 말고 말해.

승현 우리 시간에 없는 이야기야. 말하기 무서운데.

아라 뭐가 그렇게 겁이 많아? 그럼 짧지만 나만 알고 있는 내 시간부터 말해줄게.

(목을 풀며) 그러니까… 벌써 5년이나 흘렀지? 그래, 5년 전 오늘. 난 침대에 앉아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오빠를 보고 있었어. 계약이 뭔지 잔뜩 긴장해서 걸 어가는 오빠의 뒷모습이…

바보 같은 오빠의 뒷모습이 나름… 나름 귀엽더라고.


승현, 아라 서로 본다.


아라 몸이 많이 좋지 않았어.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누워 눈을 감았는데 빗소리가 들렸 어. 토독토독.

그리고 시계 바늘 소리도 들렸어. 똑딱똑딱.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 오빠가 좋아하는 소리가 밖에서 들리고, 오빠 심장 소 리가 내 옆에서 들리고, 오빠의 온도가 침대에서 느껴지고.

정말 깊은 잠이었어. 그렇게 푹 잤던 기억이 없어. 내용도 없는 꿈을 꾼 것 같은데 너무 달콤했어.

빗소리가 점점 멀어졌어. 토독토독. 시계소리도 멀어 졌고. 똑딱똑딱. 오빠의 온도 만 따뜻하게

남아있었어.

많이 아프긴 아팠었나봐. 침대에 묻어있던 오빠의 온도가 점점 높아지는 걸 몰랐 거든.

토독토독 빗소리는 어느새 타닥타닥 불꽃 소리로 바뀌고 있었고, 똑딱똑딱 시계 소리는 끼익끼익 쇳덩이 소리로 바뀌고 있었는데.

승현 ‘함께 일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대표님의 말을 마지막으로 우산도 쓰지 않고 작업 실로 뛰기

시작했어. 온몸이 다 젖었지. 그게 빗물인지 땀인지 아니면 눈물인지.

너무 신난 나머지 계약서를 들고 뛰었지 뭐야? 계약서가 다 젖어서 알아보질 못 하겠는거야.

이거 아라한테 엄청 혼나겠구나 싶어 케이크를 샀어. 다 젖은 계약서 를 케이크위에 놓고.

혹시 케이크가 젖을까봐. 작업실에 도착했더니 아라는 없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만 잔뜩 있더라.

비가 그렇게 오는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몰려 들었어. 몰리는 사람들처럼 커지는 불길은 잡히질 않았지.

아라 흥미진진한데?

승현 (웃으며) 그날 밤늦게 불길은 잡혔어. 까맣게 타버린 지붕, 기둥, 침대, 옷장, 선 반, 소파….

잿더미에선 시계 부품들이 나왔어, 돌아가지 않는 시계 바늘들, 로마자로 된 숫자들, 더는 부딪칠 곳이 없는 자명종까지.

빗물에 녹아버린 잔해들 속에서 아라의 회중시계가 피어있더라. 오전 10시 28분이었어.

갑자기 그 상황에서 정말 웃기게도 내가 걸었던 마법이 생각났어.

우리의 회중시계는 항상 같은 시간을 살아갈 거야. 똑딱똑딱.

내 회중시계를 꺼내 아라의 회중시계 옆에 두었어. 계속 돌아가는 내 시계바늘 이 어울리지 않더라. 똑딱똑딱 가고 있는 내 시계가 미웠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네 시계가 슬펐어.

그렇게 난 멈춰 서 있었어. 나름 오랜 시간을.

(사이) 다음 날 오후 2시 1분. 내가 내 시계를 멈추게 했어.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서. 똑딱똑딱.

아라 이제야 내 멈춘 시간과 오빠의 멈춘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어.

많은 일이 있었네. 고생했겠어.

승현 널 떠나보낼 수가 없었어. 내 미래는 너였으니까.


사이


아라 곧 2시 1분이야.

승현 마법은 어떻게 푼 거야?

아라 우연한 것들이 우리 공간에 들어오니까, 모든 게 불안해지니까, 마법이 펑 풀려 버렸어.

우린 멈춰있지 않게된 거야.

승현 난 여기 계속 있을 거야. 행복했던 순간 속에 멈춰있고 싶어.

아라 그렇게 해.


회중시계를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승현 사랑해. 아니, 이젠 ‘사랑했어’가 맞는 말이야?

아라 그 말만큼은 예외야. 나도 사랑해. 너무 많이.


아라, 퇴장.

승현, 아라의 회중시계를 보다가 자신의 회중시계를 꺼낸다.

선반 위에 올려놓으려다가 다시 잡고 흐느낀다.


암전.


[Epilogue]


작업실 안으로 들어오는 기태.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소파에 앉는다.

손목시계를 꺼내 확인한다.

승현, 등장.


승현 망가진 시계인가요?

기태 네…. 어? 사람이 있었네?

승현 사람? 뭐, 그렇다고 치죠.

기태 죄송합니다. 빈집인 줄 알고. 이 근처에서 사고 난 적이 있어서요.

나름 추억이라 찾아와 봤어요.

승현 그래요? 저도 여기서 사고 난 적이 있는데.

기태 (사이) 큰 사고였나 보네요.

승현 그렇죠. 큰 사고.

기태 그쪽도 추억 때문에 여기?

승현 네, 그리고…. 준비가 덜 돼서?


기태, 손목시계를 보다가 선반에 올려놓는다.


기태 가질래요?


승현, 시계를 받는다.


기태 가끔 거꾸로 가긴 하는데. 아직 괜찮아요.

승현 정말 괜찮아요?

기태 네, 시계 잘 아시는 거 같은데 고쳐서 쓰세요.

승현 아뇨, 그 쪽 괜찮은가 해서.

기태 네. 이제 똑바로 가는 시계 하나 장만하려고요. 뒤로 가지 않는 시계로.

승현 ….


기태, 나가려다 아라의 회중시계를 발견한다.


기태 저기요, 여기 정말 신기한 곳이에요.

승현 네?

기태 저 여기서 사고났을 때 기절 했었나 봐요.

(아라의 회중시계를 가리키며) 그때 꿈속에서 어떤 또라이… 아니 귀신인가 마법사인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시계에요. 시계에 갇혔다나 뭐라나?

승현 ….

기태 바보 같긴 한데, 여기서 그 여자를 만나면 말해주려고 했거든요.

혼자 갇히지 말고 나가라고. 답답하게 뭐하는 짓이냐고.

승현 답답하다고요?

기태 네. 저도 그랬거든요. 제 손목시계 속 주인공한테 잘못한 것들 있잖아요?

그게 참 저를 옭아 메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알았어요.

나 혼자 끙끙대고 있었다는 걸. 뻔한 말이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니까.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란 소린 아니지만. 우린… 살아가니까.

승현 그렇네요.

기태 그쪽도 비슷한 것 같네요.

승현 ….

기태 나 조금 멋있지 않았어요?


기태, 나간다.

승현, 기태의 손목시계를 본다.


승현 시계가 깊다.


승현, 자신의 회중시계를 꺼내 열어본다.


승현 똑딱똑딱.


작게 시계 바늘 소리가 들린다.

승현, 회중시계를 닫지 않고 아라의 회중시계 옆에 자신의 회중시계를 놓는다.

승현 퇴장.


아라, 등장.

닫히지 않은 승현의 회중시계를 집어 든다.


아라 똑딱똑딱.


아라, 승현의 회중시계를 닫는다.


암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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