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세 번 선크림, 진심이 된 남자
피코레이저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건 6개월 전쯤이었다.
출산 후 칙칙해진 피부 톤과 기미로 고민하던 친구들과의 수다 속에서
피코레이저가 기미에 효과가 좋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레이저 시술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나에겐 낯선 세계였다.
그래도 그날 이후 ‘피코레이저’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피부 때문이 아니라,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은 싱가포르인이고, 나는 한국인이다.
그는 한국 여자들은 피부과 시술에 빠삭하다고 굳게 믿는다.
특히 “피부는 한국이지”라는 막연한 신뢰도 한몫했다.
하지만 나는 피부 시술엔 1도 모른다.
그렇다고 “나도 잘 몰라” 하긴 뭐해서,
얼마 전 친구들에게 들은 피코레이저 이야기를 꺼내 들고
검색을 시작했다.
그러자마자 내 피드엔 피코레이저 광고가 쏟아졌다.
그중 눈에 띈 광고 하나.
“피코레이저 1회 45불, 의사 상담 무료.”
싱가포르 물가를 생각하면 꽤 괜찮은 조건처럼 보였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자 바로 말했다.
“좋네. 대신 예약은 좀 부탁할게. 바쁘니까.”
웃으며 넘기는데, 왠지 진심이었다.
지점이 싱가포르에만 19개나 있다는 에스테틱.
가장 가까운 곳에 연락하니 바로 예약이 잡혔고,
스케줄이 바뀌어 시간 조정을 부탁하자
1초 만에 답장이 왔다.
너무 한가한 병원이면 어쩌지…? 약간 의심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서
예약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김에 1층 맥도날드에서
신메뉴 버거를 나눠 먹었다.
그리고 드디어 피부과의 문을 열었다.
병원은 조용하고 깔끔했다.
직원과 간단한 상담을 하고
남편의 얼굴을 정면, 측면, 요리조리 사진으로 찍었다.
그 사진을 보며 의사와 상담을 이어갔다.
피코레이저 외에도 '옐로우 레이저'라는 걸 추천해줬다.
기미뿐 아니라 피부톤까지 맑아지는 효과가 있다며
슬쩍 프로모션 이야기도 곁들였다.
일단 1회만 받아보기로 하고,
남편은 얼굴 전체에 마취크림을 바르고 20분간 대기했다.
30분 후, 시술을 마치고 나온 남편 얼굴을 보고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갈색이던 기미가 까맣게 변해 있었다.
레이저 자극 때문이라고 했다.
의사는 자외선 차단제를 하루 3~4번씩 꼭 덧바르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다시 방문하라는 말도.
피부과를 나서면서 남편과 나는 동시에 웃었다.
기미가 옅어지든 말든, 이 낯선 경험 자체가 꽤 신선했다.
“아프진 않았어?”
“마취 덕에 괜찮았어. 근데 뾰족한 걸로 살 긁는 느낌은 있었지.”
그는 늘 그렇듯,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집에 돌아오자 남편은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돼?”
하고 물었다.
“미온수로 세수하고 와.”
내 말이 끝나자 그는 TV를 끄고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마친 남편은 조심스럽게 내 앞에 앉았다.
화장솜으로 남은 물기를 부드럽게 닦고,
한국에서 사온 미백크림을 얇게 펴 발라줬다.
그리고 병원에서 받은 진정 크림을 면봉으로 조심스레 덧발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릴 적 내 남동생이 떠올랐다.
사춘기 무렵이던 동생은 하루는 진지하게 나에게 물었다.
“누나, 얼굴이 하얘지려면 어떻게 해야 돼?”
나는 뿌듯하게 내가 쓰던 로션을 건네며
“이거 바르면 돼.”
하고 말했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누군가 나를 믿고 얼굴을 맡긴다는 것.
어쩐지 귀엽고, 묘하게 뿌듯한 일이다.
다 마무리하고 나자 남편은 살짝 웃었다.
“그런데… 점심쯤에 회사에서도 이걸 또 발라야 해?”
자외선 차단제를 들여다보며,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꼭 여자 된 기분이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뻐지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기미는 옅어질 수 있을까.
사실 그보다 더 궁금한 건,
선크림 덧바르며 출근하는 그 남자의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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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코든, 선크림이든… 진심이면 다 귀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