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말을 걸어오는 하루
2019년 6월 15일.
그날이 내 인생에 이렇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무심히 지나치던 하루였고,
살면서 수없이 지나온 날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하루가,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을 가장 깊이 떠올리게 되는 날이 되었다.
어릴 적, 엄마와 아빠가 함께 계시던 시절엔
외가 쪽 식구들과 자주 어울렸고,
여름방학이면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가
사촌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려 놀곤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부모님이 따로 살게 되시면서
자연스럽게 외가와도 거리가 생겼다.
나는 아빠와 함께 살았고,
그 후로는 외할머니를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할머니는 나를 얼마나 많이 걱정하셨을까.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이제 와서야 뒤늦게 헤아려보지만,
그런 마음을 그땐 왜 그렇게 알지 못했을까 싶어
문득 가슴이 아릿해진다.
좀 더 일찍 마음을 다해 안부를 전했더라면 좋았을 걸.
그 마음, 참 오래도록 마음 한켠에 남는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조금씩 다시 외할머니를 찾아뵙기 시작했다.
할머니와의 추억은
항상 따뜻했고,
언제나 사랑이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그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다.
멀리 떨어져 지낸 시간들보다
가끔 찾아뵈었던 짧은 만남들이
오히려 더 깊은 온기로 기억된다.
그러다 해외로 직장을 옮기면서
다시금 멀어졌다.
1년에 한두 번 뵐 수 있을까 말까.
물리적인 거리만큼 마음의 간극도 생겨나곤 했다.
그러다 코로나 직전,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무렵,
할머니의 건강이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이유 없이 카메라를 샀다.
인생 첫 카메라.
계획도, 목표도 없이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충동적으로 산 그 카메라로
나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하나둘 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지금도 가끔은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때의 나는 아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시간이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나는 할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진도 찍고, 영상도 남겼다.
90세가 넘으셨지만 늘 정정하셨고,
우리는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는 100살 넘게 무병장수하실 거예요~”
그러면 할머니는 장난스레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언제 죽는다냐~ 빨리 죽고 싶은디!”
그 말이 그렇게 웃기면서도
지금은 어딘가 가슴을 찌른다.
할머니는
예고 없이,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래서 더 그립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그 마지막 몇 달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할머니를
제대로 마음에 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큰 선물이었는지를
이제야, 아주 깊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엔 못다 한 일들이 오래도록 남는다.
다리가 아프다고 하셨을 때
제대로 주물러드리지 못했던 일.
밥 한 번 차려드리지 못한 채
늘 받기만 했던 기억.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이제는 마음속에서 무겁게 되뇌어진다.
나는 어느새 결혼을 하고,
재작년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할머니는
내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모습을
상상해보신 적이 있을까.
우리 아이를 보셨다면
틀림없이 두 팔 가득 안고
“에구 이뻐라~” 하며 웃으셨겠지.
그 장면을 상상하다 보면
할머니가 여전히 내 곁에 계신 것만 같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할머니가 되고
어느 날
내 아이들과 손주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 할 날이 오겠지.
그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할머니는 더 자주 떠오를 것 같다.
그리고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어질 것이다.
오늘은, 당신을 떠올리는 날입니다.
할머니, 잘 계시죠?
마치 오로라처럼 빛나는 천지연 폭포의 물빛을
함께 보고 싶었다.
“다리가 좀 아프다” 하시면서도
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주신 할머니.
그날따라 천지연 폭포 길은
유독 더 맑고, 더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