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엔 수영장 오후엔 도서관
어느덧 수영 3개월 차에 접어든다.
유연성 하위 1% 선천적 신체 구조 결함상 아직 자유형으로 10미터를 못 간다. 안타까워하는 강사의 한숨, 멀어져 가는 앞사람과 추격하는 뒷사람으로 인한 불안감과 좌절 보다 웬일인지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질 체력으로 휴일이면 못다 한 잠을 청하고 유튜브에서 비추는 타인의 여가생활을 부러워하며 하루를 보냈었다. 독서를 시작하고 실행력이 급상승한 건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뒤늦게 자전거, 수영 등 운동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생초보로서 수영은 물에 들어가는 느낌이 좋아서 그리고 잘하는 사람들의 폼이 너무 멋져서 매력이 있다. 수영장 방문 첫날, 상급자 레인에서 접영으로 물살을 파워 있게 가르는 모습이 얼마나 생동감 있고 멋져 보이던지.. 나비같이 우아하게 집중하는 강렬한 이미지가 피폐하고 민망한 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현실은 잔인한 법, 현실과 환상의 간극을 좁히는 데 그만큼의 노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거 없는 환상과 기대는 부단한 성찰이 없으면 실망으로 이어진다. 저주받은 몸뚱이를 비난하는 대신 현실을 직시하여 내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민폐가 되지 않도록 늦은 진도를 빼느라 시간이 되면 자유수영을 간다.
어찌어찌 발차기는 조금 되는 것 같으나 팔 돌리기와 호흡이 아직 멀었다. 그러나 첫날의 물속에서 호흡곤란으로 머리통이 깨지는 경험을 한 나로서는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허리디스크, 목디스크, 회전근개염증 등 몸상태가 좋지 않아서...라는 변명이 턱밑까지 차오르지만 발설하지는 않는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고 나를 잘 케어할 사람은 나이다. 구구절절 핑계로 회피하지 않고 그 에너지를 근육, 호흡에 집중하겠다. 시간은 오래 걸릴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존재의 변화와 가능성을 체험하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워보고자 한다.
쉬는 날 오전에는 수영을 하고 오후에는 도서관에 왔다.
우연히 실존주의 하이데거 선생을 만났다.
'실존주의는 20세기 전반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사상으로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플라톤으로부터 데카르트 까지 서구 철학을 관통한 이원론, 일반적 본질, 이상향이 있다고 설정하는 것을 배격하고 개개인의 실존과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한 사람의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인간의 실존은 세계 내 존재이며 고뇌, 죄책, 죽음등의 한계상황에 직면하며 현존재로서 주체성, 자유, 초월, 결단, 상황, 성실 등의 덕목을 강조하며 특히 현대의 허무와 자유 속에서 자기 부정과 자기 초월의 반복을 통해 자각적인 주체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래적 존재방식은 현존재가 자신의 한계를 가능성으로 인식하고 그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향할 때 맞이하는 실존적 시간, 익숙한 것과의 결별, 세계와의 단독자적인 조우는 곧 현존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린 불안을 야기한다. 한계상황속의 현존재의 존재양식은 '마음씀'이며 마음씀의 구조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상의 통일인 근원적 '시간성'이다. 인간은 매 순간 미래를 향하여 기투할 수 있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과거에 존재했음과 미래의 가능성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현존재의 현재를 선험적으로 규정한다.'
혹자는 걸으면서 철학을, 혹자는 달리면서 소설을 쓴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호기롭게 수영하면서 철학을 한다고 말하겠다. 하이데거와 실존철학을 읽으면서 나의 수영 연습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을 느꼈다.
과거 현재 미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신념 아래 있는 한 믿어야 한다. 나의 존재를 기투 한다. 물속, 미지의 세계에 내 몸을 맡긴다. 물이 존재하고 내가 존재한다. 나는 물을 알고 싶고 물이 나를 받아주기를 바라지만 다가가는 기술이 서툰 사람인가 보다.
혼돈과 불안 죽음을 느낄 정도로 숨이 막히지만, 그러나 나는 나의 가능성을 믿는다. 지금은 아니지만 머지 않아 뜰 것을 믿는다. 과거의 나는 물의 세계와 나의 조합을 몰랐으나 미래의 내가 물과 친해지고 물살을 가르는 것을 볼 수 있기에 현재의 나는 코로 목으로 수영장 물을 먹어도 희망을 가진다.
그러나 물은 좀처럼 그 본성을 열어 보여주지 않는다. 숨을 못 쉬게 하고 물을 맥여 공격함에도 그 존재를 알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물과 만나는 것이 너무 매력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단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물음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지,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묻고 '행동'하는 존재라 하였다. 세계 속에 나를 던지는 주체적 삶을 살라고 한다.
경험을 하면 나를 알 수 있고 세계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편협한 시각과 세상에 대한 부정적 시선으로 도전하기를 주저하였다면 먼저는 자신을 선입관 없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도전과 실행 과정에서 스스로를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열등감이나 우월감이 지배하면 실천하기 어렵다. 스스로를 남들과 다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열등감에 빠질까 회피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여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타인을 각각의 독특하고 개별적 우주로 인정하면 거리낄 것이 없다. 누구나 예외 없이 가능성의 존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는 존재물음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자, 실존하는 인간이다. 실존이란 본질에 선행한다고 한다. 본질이 무엇인지 따지고 들기 전에 먼저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 수영을 하는 것이 이득인지? 한정적인 정보와 관념으로 시시콜콜 묻고 따지기 전에 먼저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개) 이득이다.
실존적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체자다.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관념, 이론, 이상, 다른 사람의 시선과 의견이 아니라 내가 존재한다가 먼저다. 지금, 여기, 그것이 시간성으로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철학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말장난인 것 같기도 하고 실체가 없이 공허하기도 하다. 따라서 객관적 사실과의 랑데부가 필요하다. 내가 물속에 입수하기는 했는데 어떻게 뜰 수 있는지, 부력이 무엇이고 추진력을 어떻게 낼 수 있는지, 광배근 활용이 물 잡기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행동하는 주관적 실존과 냉철한 객관적 사실을 아우르는 자세가 필요하다.
철학은 우리를 질문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정확한 사실은 그것에 엔진을 달아준다. 질문 없이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세상의 다양한 것을 맛보는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고급 뷔페에 가서 아는 맛만 먹고 나오는 사람은 아닌지? 선입관과 걱정으로 실행을 방해하는지? 삶의 의미는 내가 나를 던져 물은 다양한 질문과 경험의 끝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